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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해밀턴 (Hamilton: An American Musical)
작곡/작사/극본: Lin-Manuel Miranda
연출/실황감독: Thomas Kail
출연: Lin-Manuel Miranda(알렉산더 해밀턴 역), Leslie Odom Jr.(애런 버), Phillipa Soo(일라이자 스카일러 역), Renée Elise Goldsberry(안젤리카 스카일러 역), Christopher Jackson(조지 워싱턴 역), Daveed Diggs(라파예트 후작/토머스 제퍼슨 역), Okieriete Onaodowan(헤라클레스 멀리건/제임스 매디슨 역), Anthony Ramos(존 로렌스/필립 해밀턴 역), Jonathan Groff(조지 3세 역), Jasmine Cephas Jones(페기 스카일러/마리아 레이놀즈 역)
실황촬영: 2016년 6월 브로드웨이 Richard Rodgers Theatre
드디어 <해밀턴>이... 국내에 상륙한 건 아니고 그냥 OTT에 상륙만 해서 VPN으로 바다를 건너 샌프란시스코 프록시로 보게 되었다. 우회하여 디즈니 플러스 앱을 까는 방법은 이하 포스트를 참고하자:
https://bibc.tistory.com/m/79
<해밀턴>은 Ron Chernow가 쓴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전기를 바탕으로, (어느새)디즈니의 남자 린마누엘 미란다가 작곡한 2016년 최고 히트작 뮤지컬이다. 철저한 역사고증보단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현재'를 표현하기 위해 라티노, 아프리칸 아메리칸 등 앙상블 포함 전원 비백인을 캐스팅(백인은 악당(전통적으로 비백인이 많이 맡아 온)인 영국군과 조지 3세 뿐이다)한 점과 랩과 힙합을 메인으로 한 넘버가 주목 받았다.
<해밀턴> 정도 되면 이미 모든 관객들이 넘버를 듣고 온다. 2015년 오프 브로드웨이 초연 때부터 이미 너무 히트했기 때문에, 공연 실황을 촬영하던 16년 6월에는 이미 <해밀턴>이 브로드웨이 최고 핫한 뮤지컬이라 관객들이 방청객마냥 정확히 박수와 환호 타이밍을 안다. 특히 오프닝의 몰아치는 띵곡 3연곡("Alexander Hamilton" -> "Aaron Burr, sir" -> "My Shot")을 듣고 있노라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 단 하나의 뮤지컬...' 같은 식상한 카피문구를 절로 읊조리게 된다.
아래 링크는 <인더하이츠> 공연 당시 2009년 오바마 대통령에게 초대 받은 린마누엘이 <인더하이츠>와 <해밀턴>의 음악감독 알렉스 라카모어의 반주로 당시에 개발 중이던 <해밀턴>의 오프닝 넘버 "Alexander Hamilton"를 부르는 영상이다. 이 때만 해도 관객들 다들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는데 기발한 조크 정도라고 생각했던 게 6년 뒤 이런 빅 뮤지컬이 될 줄은...
https://youtu.be/E8_ARd4oKiI
그런!데! 오프닝 넘버는 해밀턴이 아닌 애런 버가 연다. <해밀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넘버는 "역사가 너를 주시한다(History Has Its Eyes On You)"인데, <해밀턴>은 대영전쟁 승리에 큰 공을 세우고 미국 헌법 제정의 기초를 다진 위인이지만 일에 치여 가족에게 소홀하고 불같은 성미에 미국 건국 이래 최초로 간통죄로 재판을 받기도 했던 다면적인 인물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인물을 그와 대립하고 항상 그의 뒤에서 시기했던 애런 버가 내레이터로서 그의 삶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애런 버는 전쟁에 갓 참여해 공을 세워 명성을 떨칠 기대에 부풀어 있던 해밀턴과 만나, 오직 살아남기 위해 상황을 살피고 입을 열지 않는 애런 버의 방식은 이후 평생동안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남을 설득하는 해밀턴과 대립하게 된다.
"My Shot" 다음에 이어지는 띵곡으로는 "The Schuyler Sisters"가 있는데, 안젤리카 역의 르네 엘리스 골드스베리가 무대를 뒤집어놓으신다(이걸로 토니상도 탔다). 언니 랩을 그렇게 잘 하시면 노래는 좀 못 부르셔도 되는 거 아닌지... 노래도 그렇게 쭉쭉 잘 하시구... 그리고 안젤리카는 이 알탕극에서 유일하게 페미니즘의 ㅍ 비슷한 거라도 말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ㅎ...
그나저나 <해밀턴>은 정말 브로드웨이 사람들이 환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뉴욕 중심부 브로드웨이 극장에 앉아서 끊임 없이 미국과 그 중에서도 특히 뉴욕을 찬양하는 뮤지컬이라니...
아 그리고 조지 3세 역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멜키어로 익숙한 조나단 그로프가 맡았다. 나사 한두 군데 빠진 폭군인데 원래 그러는지 아니면 하필 이 날 유독 심했던 건지 노래하면서 침을 거나하게 흘려서(거의 뱉은 수준) 그대로 영상에 박제되었다. 그리고 그걸 본 팬들은 1열에 앉아서 침 맞은 사람 나야나 시전 중. 이런 코믹 연기도 잘 하는지 몰랐는데 전체 극에서 한 3번 나오나...? 근데 나올 때마다 임팩트 강력하게 빵 터뜨리고 들어감.
그리고 보스턴 차 사건을 언급하는 순간 갑자기 가물가물하게 사회탐구 수업 시간이 떠오르는데... 사실 <해밀턴>도 역사, 과학 등 여러 분야를 재미있게 풀어놓은 교육용 전집 앗!시리즈나 역사 속 인물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랩으로 싸우는 병맛 콘텐츠 Epic Rap Battles of History랑 기본적으로 비슷한 결인 것 같은데 이건 또 유치하거나 교육용이란 느낌 없이 정통 뮤지컬로 뽑혀서 신기하다.
(실제로 ERB 시리즈 중에 조지 워싱턴vs윌리엄 월러스 편과 토머스 제퍼슨vs프레데릭 더글라스 편이 있다. 재미로 보시라고 조지 워싱턴 편 놓고 감 https://youtu.be/dl7CLaZFG1c)
대영전쟁은 1막 후반부에 끝이 나고, 전쟁 이후 해밀턴은 워싱턴 밑에서 최초 헌법 제정에 공헌하며 승승장구한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던 햇병아리 시절 해밀턴을 만났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어느새 자신을 뛰어넘은 해밀턴을 시기하게 된 애런 버는, 그럼에도 자신의 방식은 옳으며 언제까지고 때를 기다리겠다는 끝장나는 넘버 "Wait For It"을 부른다. 애런 버의 빅 넘버들은 침착하게 시작했다가 참다참다 내면의 분노가 터져나오듯이 거칠게 끝나는데 배우의 연기도 연출도 정말 좋다. 배우인 레슬리 오돔 주니어도 인터뷰에서 이런 멋진 넘버를 부를 수 있다는 게 정말 복 받은 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https://youtu.be/ulsLI029rH0
2막은 아주그냥 화려하게 프랑스에서 돌아온 토머스 제퍼슨이 막을 여는데, 영국이 패하고 새로 건국한 미국에서 해밀턴과 새로이 정치적으로 대립할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토머스 제퍼슨/라파예트 후작 역으로 토니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다비드 디그스가 연기했는데(같이 후보로 오른 조지 3세와 조지 워싱턴을 제치고 받음) <해밀턴>에 나오는 랩 중에 다비드의 랩이 제일 빠르다고 한다. 1막에서는 비음 섞인 프랑스 발음으로 무대를 뒤집어놓으시더니 2막에서는 다닐 때마다 앙상블을 대거 끌고다니며 사람 설레게 함. 의회에서 양 당이 각자 의견을 발표하는데 조지 워싱턴이 MC가 되어 랩 배틀을 주최하고 드랍더마이크 하면 해밀턴/라파예트가 받는 식이다. 최근에는 많이 시도된 방식이긴 한데 처음 봤을 때 진짜 재미있었다.
해밀턴이 바람 나서 남편에게 돈을 지불하고까지 계속 만남을 이어가던 마리아 레이놀즈가 나올 때에는 많이... 보기가 힘들었다. 정말 흔한 게 불륜 얘기고 서사의 소재로서 불륜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해밀턴>에 정말 이유 없이!!!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나ㅎ를 표현하기 위한 저질 대사(헤라클레스 멀리건: 너네 엄마가 또 오라더라/필립 해밀턴: 난 아빠의 두뇌와 지성을 닮았대 근데 여성분들이 그러시길 다른 데도 닮았다던데(꼬추를 가리키며))가 생각보다 진짜 많을 뿐더러 마리아 레이놀즈와 외도하는 넘버를 전형적인 몸의 이끌림ㅎ육감적인 여인의 거부할 수 없는 대쉬ㅎ 식으로 표현해놔서... 특히 '다리를 벌리고 머무르라는데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부분 들을 때마다 기겁함
여튼 그렇게 해밀턴 저새끼의 목을 쳐라 라는 심정으로 짜게 식어서 보고 있었는데 필리파 수가 또 너무 기깔나게 "Burn"을 불러서... 필리파 수 정말 잔잔함 속의 격정 연기 장인이다. 여기서부터는 해밀턴이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 돈에 손을 안 댔다는 걸 증명하려고 레이놀즈 스캔들을 스스로 공표하고, 아들 필립은 아버지를 모욕한 남자와의 결투에서 죽고 알렉산더와 일라이자는 교외로 이사해 슬픔을 감내하고... 계속 눈물의 도가니고 아들 죽은 후 차갑게 가라앉은 일라이자 표정 정말 고통과 슬픔과 분노 다 느껴지는데 아내에게 용서 받은 해밀턴이 또 너무 불쌍하게 으아앙 하고 울어서 속으로 해밀턴이랑 약간 화해하게 된다. 린마누엘 노래랑 연기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닌데 약간 찌질한 연기 진짜 잘 하는 듯...(그래서 우스나비 진짜 잘 어울렸음)
애런 버는 존버하던 방식을 버리고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살길을 찾아 반대파 당원으로 활동하더니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라 토머스 제퍼슨과 맞붙는데, 팽팽한 접전 속에서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하면서 제퍼슨에게 패한다. 자신의 마지막 기회까지 망쳐놓은 해밀턴을 용서할 수 없었던 애런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마지막 순간 죽음을 직감한 해밀턴은 하늘 위로 팔을 올리지만 애런 버는 해밀턴을 겨누고 발사하고 해밀턴은 일라이자와 안젤리카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항상 뒤쫓아오는 죽음을 생각하며 남은 시간이 없는 것처럼 달려왔던 해밀턴이 진짜 죽음 앞에 서자, 죽음은 리듬도 박자도 없는 멜로디였고 죽은 전우와 아들에게로 향하며 일라이자에게 '천천히 오라'고 당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잘못된 선택을 한 애런 버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악인으로 남아버렸고, 불륜 사건 후 침묵으로 일관했던 일라이자는 해밀턴의 죽음 후 남편의 유산과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다시 스스로를 역사의 내러티브 속에 개입시킨다. 일라이자는 남은 생 동안 해밀턴과 해밀턴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유산을 기리고, 그리던 남편과 재회하며 죽음을 맞는다.
작품에는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이지만 <해밀턴>을 보고 싫어하기는 힘들 듯 하다. 랩이 가미된 신선한 넘버, 뭐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안무와 연출, 그리고 뭣보다 넘버를 통한 감정 표현이나 상황전개가 탁월하고 몰입된다. 공연계에서 <해밀턴> 모르면 간첩... 수준이 아니라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지경인데 드디어 그 <해밀턴>을 봤다는 기쁨도 있고. 그리고 아무리 타이밍이 잘 맞거나 소재가 독특해도 그것 뿐만으로는 진정한 히트작이 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해밀턴>은 언제 나와도 히트했을 거라고 느낄 만큼 배우들의 연기, 짜임새, 연출 안무 세트 등등 모든 게 수작이다. 특히 오바마 재임 시기에 공연되면서 <해밀턴>은 현대의 '진짜' 미국을 대표하는 뮤지컬로 이례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슬프게도 트럼프가 집권하는 현 시국에 보니 꿈 같은 옛날 얘기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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