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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베이니 가족 (We Were The Mulvaneys, 1996)

지은이: 조이스 캐롤 오츠 (민승남 역)

출판사: 창비

잘 나가는 지붕회사를 운영하는 아빠, 괴짜지만 가정적인 엄마, 촉망 받는 운동선수인 첫째 아들과 수재인 둘째 아들, 예쁘고 신실한 외동딸, 귀여운 막내 아들까지. 인근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하이포인트 농장에 사는 멀베이니 가족은 부유하고 주위의 평판도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멀베이니 가족의 행복은 박살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이후 스포일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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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베이니 가족

미국의 대표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풀어낸 미국적 삶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거장, 한해 평균 두 권 이상이라는 놀라운 창작력을 자랑하며 시, 소설, 산문, 희곡 등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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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멀베이니 가족이었다. 우리를 기억하는가? (p.10)

<멀베이니 가족>은 멀베이니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과 길고 처절한 극복의 과정을 그린 가족 일대기(수난기?)다. 1976년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완벽한 가족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를 극복했는지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의 이야기를 다룬다. 장장 4부에 에필로그까지 있는 <멀베이니 가족>을 읽고 있자니 마치 3대를 그린 영화 <대부>를 보는 느낌이었다. 원제처럼 '우리는 멀베이니 가족이었다(We were the Mulvaneys)'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멀베이니 가족>은 사진으로 꽉 차 뚱뚱해진 가족 앨범을 첫 장부터 넘기듯 멀베이니 가족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멀베이니 가족은 지역 신문에 실릴 정도로 유서 깊은 하이포인트 농장에 사는 가족으로, 아버지 마이클 멀베이니 시니어는 멀베이니 지붕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며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지역 내 프리미엄 사교클럽에 가입한, 나름의 명망 있는 인사다. 어머니 코린 멀베이니는 겉치장에 관심이 없고 괴짜지만, 누구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한다. 첫째 아들 마이키 주니어 멀베이니는 학교의 스타 풋볼선수고, 둘째 아들 패트릭 멀베이니는 냉소적인 면이 있긴 해도 생물학에 열을 올리는 수재다. 외동딸 매리앤 멀베이니는 성적도 우수하고 신앙활동도 열심히 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모범생이다. 그렇다, 멀베이니 가족은 마을 사람들 누구나 알고 부러워하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었다. <멀베이니 가족>의 포문을 여는 것은 개성 강한 부모님과 형제들에 비해 다소 특징 없어 보이는, 제일 늦게 태어난 탓에 가족의 역사에 대해 제일 모르는 것이 많은 막내아들 저드 멀베이니가, 1976년의 그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자 하면서이다.

저는 술을 마셨어요. 제 탓이에요.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어떻게 그를 죄인으로 모는 증언을 할 수 있겠어요! (p.253)

매리앤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6년, 발렌타인 데이 파티에서 놀던 매리앤은 4학년 선배 재커리 런트가 건넨 술을 마시고 취해 그에게 강간 당한다. 폭행의 증거가 확연했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에 평화주의자인 매리앤은 '모두가 말렸는데 술을 마신 자신의 탓이 크고,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재커리 런트를 죄인으로 몰 수는 없다'며 고발도 증언도 거부하고, 오로지 신앙과 기도에서 낙을 찾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림 같은 행복한 삶을 살던 멀베이니 가족은 파멸로 치닫게 된다. 

마이클은 무작정 재커리 런트의 집에 찾아가 그와 말리는 재커리의 아버지를 폭행하고, 매리앤은 자신이 재커리 런트를 고소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고소를 면할 것을 알고 사건을 덮기로 한다. 학교에는 '매리앤이 원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소문이 돌았고,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덮고 싶은 마음과 '그' 잘나가던 멀베이니 가족에게 묻은 얼룩에, 마을 사람들은 삽시간에 멀베이니 가족에게서 등을 돌린다. 마이클은 매리앤의 사건을 고발하는 걸로 시작해서 자신에게 모욕을 준 사교클럽 사람들, 열의를 보이지 않은 지방검사 등 떨어지는 자신의 위신을 붙잡으려는 듯 계속해서 변호사를 만나러 다니며 돈을 쓰고, 술과 담배에 의존하게 된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며 가업을 물려받을 듯 했던 마이키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가 군에 입대하고, 둘째 패트릭도 졸업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코넬 대학으로 떠난다. 코린은 화목했던 가정의 끝자락을 쥐고 고군분투하지만,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다는 마이클의 의견에 따라 매리앤을 친척에게 보내고 집에 오지 못하게 하는 선택을 내린다.

이렇게 매리앤이 당한 성폭력 사건은, 매리앤과 가족들 개개인에게 끔찍한 상처를 남김은 물론 슬픔과 분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가족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른다. 마이클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느껴온 사랑스러운 딸을 위해 복수해주지 못한 자괴감과 수년 간 노력해온 자신의 사회적 입지가 물거품이 된 절망을 눈 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해 부당하게도 매리앤을 저버렸고,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염불만 외던 코린은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그에 동조한다. 형제들은 매리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 사건은 집 안에서 언급이 금기시되었고 그들 또한 한 명도 제대로 매리앤을 위로하지 못 한다.

찢어진 거미줄이, 그의 손에 붙어 반짝이던 거미줄이 뇌리를 스쳤다. 마구간 뒤의 높이 자란 풀밭을 걸어가다가 생긴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거미줄을 보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 거미줄이 아니다. (p.410)

매리앤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던 친척집을 떠나 변변찮은 대학에 다니며 그린 아일 협동 조합에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한다. 협동 조합은 공동 노동과 나눔의 즐거움을 역설하는 그럴 듯한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매리앤은 조합에서 일하느라 정작 대학 수업은 제대로 이수하지도 못 하고 그걸 문제라고 자각하지도 못 한다. 여전히 엄마는 자신을 집으로 부르지 않고, 그 와중에 겉만 번드르르하지 별거하는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협동 조합 대표의 청혼까지 받는다. 여성의 고통이라고 하면 강간, 낙태(또는 유산), 매춘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일부 남자 작가들과 달리, 180도 달라진 매리앤의 삶이 너무나 생생해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협동 조합에서도, 이후 옮겨다닌 곳에서도 매리앤은 업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만, 강간 사건 이후 매리앤은 자신이 주목 받거나 자신에게 타인이 의존하게 되는 걸 못 견뎌해서 몸 담은 곳에서 자신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싶어하면 떠나 버린다. 자투리 천을 모아 기운 퀼트 이불처럼, 엄마가 자신의 삶을 '누더기 퀼트 인생'이라며 한심해할 거란 생각에 사로잡힌 매리앤의 심정이 숨 막힐 정도로 피부에 와 닿았다. 

<멀베이니 가족>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둘째 형 패트릭 멀베이니다. 어릴 때부터 과학에 몰두하며 또래 남자들의 야만성과 무지함을 혐오하고, 멀베이니 가족에서 혼자 튀는 괴짜였던 패트릭은 코넬 대학에서 승승장구하다 돌연 재커리 런트에게 복수하겠다며 저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저드는 사건 당시 가장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던 패트릭의 의외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에게 무조건적인 협조를 약속한다. 패트릭은 학위고 연구고 뭐고 때려치우고 복수 계획을 세우는 데에만 매달리고, 저드가 훔쳐다 준 아버지 마이클의 총을 받아들고 재커리 런트를 찾아간다. 여러 변수를 고려하며 오랜 시간 복수를 계획해 온 패트릭은 자신이 내보인 총구에 벌벌 기며 오줌까지 지리는, 너무 쉬운 먹잇감이 되어버린 재커리의 모습에 당황한다. 인적 드문 늪에 재커리를 빠뜨려 죽이려던 패트릭은 결국 재커리를 살려주고, 대학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난다.

멀베이니 가족에게 일어난 1976년 발렌타인 데이의 사건을 다루는 1부와 패트릭의 복수와 실패를 그린 2부가 끝나면, 3부는 빚 때문에 하이포인트 농장을 팔고 변변치 못한 집으로 이사한 남은 멀베이니 가족(마이클, 코린, 저드)에게 일어나는 비극의 클라이막스다. 젊었을 때 어울렸던 질 나쁜 친구들과 합류해 술에 절어 살던 마이클은 가족들을 남기고 떠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더욱 밑바닥 인생을 살고, 저드는 코린에게 술에 취해 폭력까지 행사하던 마이클에게 대들다 집을 나간다. 남겨진 코린은 완전히 절망한다. 저마다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멀베이니 가족의 삶이 너무 생동감 있게 끔찍했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이클은 폐암으로 길거리에서 쓰러져 멀베이니 가족은 그의 병실에서 다시 모이고, 매리앤은 십여 년 만에 죽음의 문턱에 선 아버지와 재회하게 된다. 멀베이니 가족의 비극은 이렇게 마이클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마이클이 사망하고 5년 후, 독립기념일을 맞아 몇 년 만에 멀베이니 가족 전원이 상봉한다. 동업자와 골동품 가게를 하는 코린, 군에서 제대하여 토목기사로 일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마이키, 젊은 편집장이 된 저드, 여러 일을 전전하다 동물보호소에 정착하고 가정을 꾸린 매리앤, 그리고 긴 방황을 끝내고 아동발달협회에서 일하며 사랑을 찾은 패트릭까지. 특히 재커리 런트에 대한 복수 실패 이후 가족과 연을 끊다시피 하고 방방곡곡을 다녔던 패트릭은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예전의 차가움과 냉소는 온데간데 없고 북적북적한 대가족에 스스럼 없이 섞여드는 진정한 멀베이니의 일원으로 변한 모습을 보인다. 불어난 멀베이니 집안과 코린의 동업자 세이블의 대가족, 코린의 외가 친척들까지 한데 모인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그래서 금방 사라질 듯 비현실적인 행복을 느끼던 저드는 한 때 증오했고 너무도 사랑하는 형의 어릴 적과 똑 같은 미소를 보고 이것이 새로운 멀베이니 가족의 행복임을 깨닫는다.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을 시작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은 심정에 더해 은근히 멀베이니 가족의 몰락을 바랐을 주변 사람들의 냉대, 이로 인해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멀베이니 가족의 몰락이 허리케인처럼 몰아친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을 읽을 때마다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그 상황의 설정과 마치 내가 직접 그 일을 목도하는 듯한 몰입감 있는 묘사에 감탄하는데, <멀베이니 가족>은 그게 특히 심해서 거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읽었다. 서술자가 저드이기 때문에 자연히 저드에 대한 묘사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어서, 마치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저드이고 중대사에서 소외되는 어린 막내가 으레 그러하듯 가족의 수난사를 애매하게 객관적인 위치에서 함께 겪고 있는 듯 했다. 온 가족이 구성원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통 받고 그 고통이 십년이 넘게 지속되기 때문에, 독립기념일을 맞아 매리앤이 친척집에 맡겨진 이후로 멀베이니 가족 전원이 처음 모이는 에필로그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매우 크다. '그래도 우리는 한 가족' 식의 핏줄을 중시하는 끈끈한 정서나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식의 낙관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라, 저마다의 고통을 겪고 돌아와 새로운 '멀베이니 가족'을 이룬 이들의 앞날에 무조건적인 행복이 가득하기를 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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