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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로열 발레단 '변신' (The Royal Ballet production of THE METAMORPHOSIS @Royal Opera House)

원작: Franz Kafka

연출/안무: Arthur Pita

무대/의상: Simon Daw

조명: Guy Hoare

음악: Frank Moon

출연: Edward Watson(그레고르 잠자 역), Laura Day(그레테 역) 외

이 사진을 봤는데 이 작품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https://youtu.be/UwTjUaQz39E

일단 이 강렬한 티저를 보고 가자. 

영국 로열 발레단에서 카프카의 1915년작 동명 소설을 각색한 <변신>(The Metamorphosis) 실황을 유튜브로 공개했다. 새하얀 무대 위, 입에서 타르 같은 끈적한 액체를 뿜어내며 기괴하게 몸을 트는 그레고르 잠자... 변신을 표현한 기법이 참신해서 일단 궁금증이 생겼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발레에 관심이 없더라도, 온 몸을 뒤틀며 흰 세트를 더럽혀가는 그레고르 잠자만 봐도 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연극, 뮤지컬은 좋아하지만 상대적으로 발레는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처럼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에 관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현대의 발레 작품을 마음껏 즐겨보시라.

그레고르는 변신 후 이빨이 없어져 평소 먹던 사과나 빵 같이 씹어야 하는 음식은 먹지 못하고, 갈아낸 액체만 먹을 수 있게 된다. 

50년대의 체코(배경이 동유럽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들이 하는 대사들이 체코어라고 한다), 그레고르는 (아무리 봐도 성격에 맞지 않는 듯한)외판원이자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낸다. 아침에는 어머니가 식탁에 내놓은 사과를 하나 먹고, 가는 길에 커피차에서 커피를 마시고, 기차를 타고, 거래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동생의 장기자랑을 봐 주고, 저녁엔 가족이 모여 항상 같은 수프를 몇 입 먹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하지만 어느 날, 다리를 위로 뻗은 채 나동그라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천장을 향한 손가락과 발가락은 수십 개의 다리가 기어가듯 끊임 없이 움직인다. 어머니는 식탁 위의 사과가 그대로임을 발견하고, 그레고르와 항상 같은 시간에 만나 일을 보던 거래처 사람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 그레고르의 집을 찾아온다. 노크해도 대답 없던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가자, 끔찍한 몰골의 그레고르가 튀어나온다.

벽과 천장을 기어다니는 그레고르
그레고르를 사람으로 돌려 보려는 동생 그레테

어린이용 <변신>이라며 유머로 회자되곤 했던 책표지 <이크! 벌레가 되었어요>에서 상상할 수 있듯(진짜가 아니라 합성이라고 들어서 이미지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변신>을 무대로 올리면서 첫 번째로 고민되는 지점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원작에서 다소 분명하게 벌레로 묘사되고 있는 '변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이다. 안무가 아서 피타가 주연인 에드워드 왓슨에게 <변신>을 처음 제안할 때도, 왓슨 또한 연출 방향이 '딱정벌레 수트를 입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고 한 바 있다. 무용극 <변신>의 그레고르는 팔다리를 벌레처럼 말고 마치 달팽이가 그러하듯 지나가는 곳마다 검은색 점액질을 남기는데, '실업자가 된 그레고르를 가족들이 벌레처럼 본 것이다', '장애를 입어 돈을 벌지 못하게 되어 그레고르가 스스로의 자괴감을 표현한 것이다' 등 여전히 그레고르의 변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해석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것처럼, 로열 발레단의 <변신> 또한 그레고르가 정말 벌레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기형이 된 것인지, 또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 명시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모호함을 유지한다. 변신한 첫째 날 그레고르 입에서 흐르던 검은 액체와 그레고르의 악몽 속에서 등장한 검은 형체들이 흩뿌리고 간 끈적거리는 액체는 그레고르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몸에 더 선명하게 묻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흔적을 남긴다. 이는 벌레의 점액질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변신의 고통을 짐작케 하고, 효과적으로 공포감을 배가시키면서 그레고르를 끔찍해하는 가족들에게도 이입할 수 있게 된다(같이 보시던 어머니 왈: "저 정도면 갖다 버려야지..."). 벌레 수트를 입지 않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온 몸이 검은 액체에 푹 젖어서도 무용수의 표정이 보인다는 점이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떡칠이 돼도 그레고르의 눈은 형형하게 슬픔과 분노를 표현해낸다. 

그래서 <변신>은 피지컬리티에 대한 작품이고, VR을 통해 맨 땅에서 가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오롯이 무용수의 몸으로만 초현실적인 내용을 표현해낸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눈속임 없는 극한의 육체는 정말 기괴했을 듯 하다. 거기다 음악은 얼마나 기괴한지, 쨍한 불협화음과 거대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 등 음악이 공포영화 뺨친다. 무엇보다 보자마자 납득할 수 있도록 '변신'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표현해내서, 그 외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를 별로 못 느끼는 것도 있다. 

그레고르의 악몽에 등장한 검은 형체들. 악몽에서 깨어도 검은 액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들도, 스스로도 더 이상 그레고르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그레고르의 인간성이 상실될 수록 그는 더욱 더 검게 덮힌다

그레고르 잠자 역을 연기한 로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에드워드 왓슨은 단연 <변신>을 있게 한 주역이다(<변신>으로 올리비에상도 탔다). 그가 연기하는 그레고르는 단 한 순간도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 벌레가 다리를 끊임 없이 움직이듯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쉴새 없이 움직이고(물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보면 같은 사람이긴 한 건지 싶다), 절대 똑 바로 서지 않으며 항상 일반적인 가동 범위 이상으로 관절을 뒤틀어 기괴함을 자아낸다. 원작에서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던 그레고르가 '다리 하나를 구부리려면 다른 다리들이 제멋대로 쭉 펴치고, 구부리려던 다리를 마침내 구부리기라도 할라치면 다른 다리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묘사했듯 에드워드 왓슨의 그레고르 또한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려 할 때마다 나머지 팔, 다리가 탄력적으로 펴진다. 

방 밖으로 나온 그레고르를 때리려는 아버지

<변신>은 1차적으로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지만 동생 그레테의 변신이기도 하다. 그레고르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어머니와 달리 그레테는 그레고르가 무엇을 먹는 지 주의를 기울이며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겁도 없이 그레고르를 만지며 사람처럼 세워 보려고 하기도 했고,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 그랬듯 방문을 열어두고 음악을 튼 채 춤을 보여주기도 했다(그레고르의 악몽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소설의 그레고르는 바이올린을 잘 켜는 동생을 위해 무리해서라도 음악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했고, 크리스마스에 이를 알려 기쁘게 해 주려고 했었다. 춤을 추는 동생을 보고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극에 달한 것을 표현한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레테가 자라면서, 그레테는 어머니를 놀래킨 오빠에게 화를 내고, 어렵게 구한 세입자마저 나가자 주동적으로 그레고르를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한데, 그레고르는 가정부가 열어둔 창문 밖으로 나가고(자살을 암시)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방에서 그를 애도한다. 그레테는 마치 나비가 허물을 벗듯 검은색 코트를 벗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한 그레테에게 마지막 순간 그레고르에게 비췄던 바깥의 빛이 비쳐 그레테를 조명한다. 소설에서 잠자 씨 부부가 죽은 그레고르 대신 그레테에게서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보았던 것처럼. 

선명하게 구분된 가족의 공간과 그레고르의 공간

<변신>의 세트는 그레고르의 방과 거실이 짧은 플랫폼으로 이어져 있고(방을 구분하는 벽은 없지만, 그레고르가 방에 들어가면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레고르의 방에 불이 켜지고, 문을 열면 어두운 방에서 문을 여는 모양대로 그림자가 생기는 등 조명과 음향을 통해 구현했다), 그 주위로 좁은 플랫폼은 커피차가 지나가고, 출근한 그레고르가 거래처를 만나는 등 외부공간이 된다. 가족들의 공간은 깔끔하게 정돈되고 얼룩 하나 없는 반면, 그레고르의 방은 갈수록 그의 흔적으로 가득 찬다. 모종의 이유들로 그레고르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면, 그레고르의 흔적이 남으면서 방문을 닫고 없는 척 무시하고자 했던 가족들의 삶에 그레고르가 침범하게 된다. 

천장과 벽에 매달리는 그레고르
자신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를 들어 거실로 옮기려고 하지만,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고 오해하게 된다. 어머니를 안으려고 절박하게 버둥거리는 그레고르가 처연하다.

가족들이 있는 거실처럼 똑바로 서 있던 그레고르의 방은 그레고르의 변신이 심화됨에 따라 뒤로 넘어가는데, 원작에서 어머니와 그레테가 그레고르가 기어다닐 수 있도록 가구를 치워 버리고 그레고르는 그것이 자신이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해 버린 거라고 느끼는 것처럼, 방이 기울어진 후 그레고르는 더더욱 더러워지고 천장과 벽을 자유로이 기어다닌다.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에야 방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변신>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과 눈과 귀를 강렬하게 사로잡는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 짧은 러닝타임으로(5시간 반짜리 파르지팔 이런 거 아니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고(가볍게 볼 수 있다고는 안 했다), 발레보단 움직임에 가까운 안무와 이따금 외치는 대사, 마임 등 연극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서 보다 친숙한 느낌을 받으며 볼 수 있었다. '발레' 하면 <호두까기 인형>, <지젤> 등을 먼저 떠올리는 나에게(발레에 관해 진짜 무지함...) 현대적인 발레를 접하게 해 주고,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강렬한 티저 이미지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작품. 영국, 미국 극장이 닫은 김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까지 덕을 볼 수 있어 여러 훌륭한 작품들을 릴리즈하고 있는 극장, 극단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유투브 계정에서 영국 시간 기준으로 5월 18일 저녁 7시까지 공개하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보도록 하자. 

 

Royal Opera House

Feel something new at the 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 If you're new to ballet and opera or have loved them all your life, we have something for you.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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