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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제인 에어 (National Theatre Live: Jane Eyre)

연출: Sally Cookson

출연: Madeleine Worrall(제인 에어), Felix Hayes(로체스터) 외

제작: National Theatre, Bristol Old VIc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웨스트엔드 극장들이 문을 닫는 것은 물론 필수 영업장에 종사하는 인원을 제외한 영국인 대부분이 자택 대피령을 받게 되면서, 공연실황의 명가 영국 국립극장에서 4월 한 달 간 NT Live 작품 4편을 유투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ntdiscovertheatre)을 통해 일주일씩 무료 공개한다. NT Live는 2009년부터 시작된 공연 실황 시리즈로, 국립극장 레퍼토리 작품을 비롯하여 Old Vic, Almeida 등 여타 지역 극장들의 작품을 선정하여 실황 중계 및 이후 영화관이나 아트센터 등에서 상영할 수 있도록 판권을 판매한다. <제인 에어>는 4월 16일까지 무료 공개되고, <보물섬>이 4월 22일까지, <십이야>가 30일까지 공개된다. 네이버 시리즈 on이나 IPTV에도 전혀 풀리지 않아서 한국 국립극장이나 메가박스가 들여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외엔 (합법적으로)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으니 꼭꼭 챙겨 보도록 하자...

이번 <제인 에어> 국립극장 프로덕션은 2014년 Bristol Old VIc에서 2부짜리 연극으로 초연되었으며, 이후 2015년에 국립극장 Lyttelton Theatre에서 1부로 각색되어 올랐다. 나니아 시리즈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이탈리아 영화 원작의 <라 스트라다>, <피터 팬> 등 (모아놓고 보니)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작품들을 많이 맡은 샐리 쿡슨이 연출을 맡았다.

<제인 에어> 무대는 전환 없이 놀이터 같은 원세트 무대와 사방을 감싼 배경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우들은 끊임 없이 목재 무대를 돌아다니고 사다리를 타는, 피지컬한 연극이다. 극의 시작은 제인의 탄생을 알리면서 시작하는데,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등장인물들의 외침이 메아리 친다. "딸이에요(It's a girl)."

제인의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사망하면서 제인은 이모 댁인 게이츠헤드에 맡겨지고, 이모인 리드 부인은 친자식 셋만 예뻐하고 고아 제인은 거두어 기른 걸 감사하게 여기라며 혹독하게 군다. 어느 날 제인은 자신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사촌 존에게 얻어맞고 화가 나 존을 물어뜯게 되고, 리드 부인은 존을 감싸고 제인을 혼내며 벌로 '빨간 방'에 가둬 버린다. 제인은 이 취급이 부당(unjust)하며, 리드 부인의 집을 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리드 부인은 제인을 고아 소녀들을 맡아 교육하는 로우드로 보내게 되고, 집을 나가기 전 제인은 리드 부인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로 리드 부인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기차를 타고 로우드로 떠나는 제인 에어

<제인 에어>는 NT Live 작품 중에서도 음악의 비중이 큰 편인데, 퍼커션이 무대에 자리해 있고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며 때때로 극에 참여한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걸 표현할 때는 위 사진처럼 배우들이 모여 달리면서 음악에 맞춰 지나치는 역 이름을 외치는 식. 마치 나까지 좁디 좁은 기차에 탄 듯 덩달아 숨이 가빠진다.

여튼 위처럼 기차를 타고 기대에 가득 찬 채 로우드에 도착했으나, 로우드도 부당한 이유로 학생들을 트집 잡고 괴롭히는 어른들이 있는 곳이었다. 제인은 책을 좋아하는 몽상가 헬렌과 친구가 되지만, 헬렌은 병으로 죽어 버린다. 

모험과 변화를 원하는 제인

몇 년 후, 로우드의 교사가 된 제인은 매일 틀에 박힌 생활을 하며 갑갑함을 느낀다(위 장면에서 목재 프레임 여러개를 모아 창문을 만들고, 자유를 갈망하는 제인을 따라 창문이 부서지듯 열리는 연출이 직관적이고 멋지다). 제인의 머릿속에선 여러 목소리들이 제인의 현재 상황을 재단하고 어떻게 할 지를 논의하는데(위 사진처럼 여러 배우들이 제인 주위를 맴돌며 의식의 흐름처럼 한 마디씩 보탠다), 자유를, 자유가 아니라면 변화를 원하는 제인은 쏜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기로 한다.

쏜필드로 가던 길에 제인은 낙마 사고를 당한 남자를 도와주게 되고, 후에 이 남자가 자신의 고용주인 로체스터임을 알게 된다. 제인은 출장이 잦고 무뚝뚝한 로체스터의 쏜필드 저택에서, 로체스터가 거둔 옛 애인의 아이 아델을 가르치며 살게 된다. 

로체스터와 파일럿(개...)

사실 남주인공인 로체스터가 등장하면서 모든 게 꼬여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제인 에어>가 <오만과 편견>과 함께 역사에 남을 로맨스 소설로 취급 받고는 있지만 어릴 때 처음 읽었을 때에도, 현재에도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문학으로서의 관점으로 더 많이 접했다. 연극 <제인 에어>도 부당한 취급에 참지 않고 저항하고, 항상 모험과 변화를 모색하는 제인의 태도에 만족하면서 보다가 로체스터가 등장하자마자 저 무례하고 별난 사람의 어디가 어떻게 좋아서 잘못된 선택들을 하는 지(실제로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되면서 제인은 머릿속 목소리들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의문들을 모두 무시해 버린다)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다. 비극적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 급행 열차를 타고 달려 나가는 느낌이랄까...

자신이 로체스터에게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름답고 부유한 블랑셰 잉그럼의 등장으로 블랑셰와 자신의 초상을 그려놓고 비교하며 절망하는 모습은 로맨스 장르 주인공의 고민이라기보다 고딕 호러의 처절함에 가깝다. 하지만 의외로 로체스터 또한 제인에게 마음이 있었고, 로체스터의 침소에 불을 지르기까지 한, 매일 밤마다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는 하녀를 집에 두는 것이나 결혼하고 일 년하고도 하루가 지난 후에 알려주겠다고 하는 비밀에 이르기까지 수상한 점이 한, 두개가 아니지만 제인은 로체스터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덥썩 결혼을 약속한다.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 제인의 실낱 같은 희망과 절망, 잠깐의 행복과 이내 둘을 덮쳐오는 나락은 이쯤 되면 비혼 권장 연극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 결혼식 장면에서는 고딕 호러 분위기가 정점을 찍어, 그 모든 미스터리를 무시한 채 결혼식을 올리는 제인에게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긴, 이질적인 재질의 베일이 씌워진다. 본격 비혼 권장 연극22

제인에게 청혼하는 로체스터

그런데 로체스터의 그 비밀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밤마다 웃음소리를 흘리던 미치광이 하녀가 사실 로체스터가 젊은 시절 결혼한 정혼자 버사 메이슨이었고, 정신이 온전치 않아 쏜필드 저택에서 남몰래 보살피던 것. 제인은 큰 충격을 받아 로체스터를 떠나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극 내내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그저 음악적 장치가 아닌 버사였다는 게 밝혀지고, '다락방의 미친 여자' 정도로 묘사되던 버사에게 마침내 목소리가 주어진다. 

맨몸으로 나와 허기와 추위에 정신을 잃었던 제인은 존 목사 남매에게 거두어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게 되고, 존은 제인에게 자신과 함께 인도로 선교활동을 떠나자고 한다. 동료 선교사로서 함께 하고 싶다는 제인의 요청과 달리 존은 하느님 아래 완전한 한 쌍이 함께 해야 한다며 결혼을 종용하고(헬렌과 아델 역을 한 여자 배우가 존 목사 역을 맡았다. 아무래도 연출이 남자 배우 입으로 이딴 소리 듣고 있을 수 없던 게 아니었을지), 제인은 새로운 삶과 가족을 향해 떠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쏜필드로 돌아간다. 

불타는 쏜필드

오랜만에 돌아온 쏜필드 저택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고, 제인은 버사가 결국 로체스터의 침소가 아닌 온 저택에 불을 질렀으며 로체스터가 용감하게 다른 사람들을 구해냈으나, 버사는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쯤 되면 다들 떠올렸겠지만 <레베카> 또한 <제인 에어>를 비롯한 고딕 로망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체스터는 살아남았으나 다리를 절고, 시력을 잃었다. 제인은 로체스터 곁에 머물고, 이윽고 아이가 태어난다. 둘은 함께 이렇게 말한다: "It's a girl."

어린 제인은 푸대자루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가 어른이 되면 코르셋을 차고 마찬가지로 긴 치마를 입는다. 연신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제인에게 커다란 치마는 불편하기만 하다.

신분, 여성차별을 숨길 생각도 없이 명쾌하게 꼬집는 제인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주제의식과 갑자기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서사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분명히 있다. 아마 <제인 에어>가 출간된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될 만큼 감히 신분이 낮은 여자가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래디컬한 소설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보면 친척의 유산을 물려 받고 신분상승을 한 데다 잘생기고 젊은 존 목사의 구애를 받고도 화재로 빈털터리가 된 못생긴 로체스터에게로 돌아오는 개념녀 서사로 보이기 딱 좋기 때문일 터다. 이미 옛날에 개념녀 탈출하고 스스로 된장녀/쌍년 되자고 했다가 이제 남자 없이 살자는 비혼 쪽으로 돌아선,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결국 로맨스 소설로 분류되는 <제인 에어>는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는 흔히 말하듯 원작 자체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It's a girl."이라는 대사로 수미상관을 이루는 구조는 굉장히 좋다. 게이츠헤드와 로우드에서 제인이 당한 폭력은 제인이 힘 없는 어린 소녀이기 때문에 가해진 폭력이었고, 선교사의 아내가 되지 않으면 인도로 선교 활동을 갈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부당도 제인이 여자였기 때문에 처한 상황이었다. <제인 에어>의 마지막은 아마 제인의 자립심과 정의로움을 닮았을, 그리고 제인에게서 조금 더 나은 삶을 물려 받아 살게 될 여자아이의 탄생을 알리며 끝난다. 원작 소설에서는 제인이 친척의 유산을 물려 받아 가난뱅이가 된 로체스터와 신분이 역전돼서 나오는데, 연극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 분량 문제는 차치하고 그 놈의 '물질적인 욕망보다' 우월한 진정한 사랑 타령이 싫어서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로체스터의 등장과 함께 '어 그거 아니야'하는 내면의 비명의 연속이지만, 단촐한 무대와 수차례 1인 n역을 맡는 적은 수의 배우들을 가지고 음악과 조명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연출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리고 여성 연출가가 다룬 여성 주인공 작품들은, 원작을 존중하면서도 시대착오적인 부분들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한 흔적들이 항상 보인다. 격정적으로 화내고 슬퍼하고 소리치는 야생마 같은 제인 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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