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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월드투어 - 부산

공연기간: 2019년 12월 13일 ~ 2020년 2월 9일

장소: 부산 드림씨어터

출연: Jonathan Roxmouth, Claire Lyon, Matt Leisy 외

제작: S&CO, The Really Useful Group, Troika Entertainment, Lotte Entertainment

<오페라의 유령>은 한국 관객들에게 더 이상 낯선 타이틀이 아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 받는 2001년 국내 초연을 시작으로 몇 차례나 공연되었고, 시그니처인 'The Phantom of the Opera'의 전주는 여느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럼에도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하면 화려한 파리 오페라하우스와 안개 싸인 몽환적인 호수와 촛대, 극 전체를 덮고 있는 미스터리 등으로 여전히 여러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듯 하다.

https://www.thenational.ae/arts-culture/on-stage/is-the-phantom-of-the-opera-relevant-in-the-metoo-era-1.908552

 

Is the 'Phantom of the Opera' relevant in the #MeToo era?

Claire Lyon, who will play Christine Daae when the musical comes to Dubai Opera, debates whether the tale highlights true love or good example of Stockholm Syndrome

www.thenational.ae

먼저 이 기사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 #미투 운동이 번져 위계에 의한 강제적 성추행/폭력에 대한 인식과 강력한 처벌이 촉구되고 있는 이 때, 유령과 (원작 기준 십대였던)크리스틴의 관계가 사랑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인지,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스톡홀름 신드롬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 크리스틴 역 배우 클레어 라이언이 인터뷰한 기사다. 공연 홍보를 위해 인터뷰한 기사인 만큼 기사에는 시대가 19세기였음과 종국에는 크리스틴 스스로가 선택함을 강조하며 공연을 옹호하는 내용이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두고 이런 기사가 나왔음에 인식이 확실히 바뀌었음을 느낀다.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나이 들어서 처음 본 친구들 중에는 내용에 거부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많기도 했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오페라의 유령>을 국내 초연으로 접하고 국내 공연은 꾸준히 챙겨 본 뒤 2004년엔 제라드 버틀러와 에미 로섬 주연의 영화, 2011년에는 25주년 기념 공연 실황을, 이후에는 처음으로 친구와 떠난 배낭여행에서 기어코 웨스트엔드의 <오페라의 유령> 공연을 보며 인생의 절반 넘게 작품을 물고 빨고 했던 팬이다. 그 후로 다양한 뮤지컬을 더 접하고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이 가시화되면서 아무래도 나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있었기에, 한국에서 8년 여만에 공연되는 <오페라의 유령>을 다시 보게 되면 이전과 같이 좋아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있었다. 어릴 때야 마냥 가면 쓴 의문의 노래 잘 하는 유령이 너무 좋아서 라울을 선택한 크리스틴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소유욕 강한 나이 든 스토커와 지하에 평생 갇혀사느니 잘생기고 젊은 자작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랜만에 다시 본 <오페라의 유령>은 '19세기의 기괴한 사건'이라 치고 넘기기에는 불편한 스토리를 갖고 있으나, 여전히 명작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오페라의 유령>을 보며 유령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까리한 가면을 쓰고 절대자처럼 등장해서는 감미롭고 파워풀한 넘버만 쏙쏙 골라 부르기 때문이다. 배우의 영향도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유령 역 배우는 리키 마틴 같은 라틴계 느낌을 풍기는 미남인데 너무나 불쌍하게 바닥을 긴다... 유령이 크리스틴이랑 똑 닮은 인형에 웨딩드레스를 입혀놓은 꼬라지(우웩)를 방금 봤는데도 동정심이 들기 쉽지 않은데 이번 유령이 그걸 해냅니다. 

넘버의 경우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넘버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관객들의 귀에 때려박는 지나친 반복으로 비판도 많이 받는데, 나는 웨버 뮤지컬의 장점은 관객들이 멜로디를 기억할 때까지 때려박는 데에 있다고 보므로... 지금 들으면 신디사이저 소리가 많이 나서 80년대 뮤지컬이 맞구나 싶긴 한데, 여러 인물이 각자 다른 멜로디로 노래하는 다중창이나 절묘한 리프라이즈를 듣고 있으면 다 아는 노래인데도 귀가 즐겁다. 

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 것이, <오페라의 유령>의 화려하지만 절제된 무대였다. 몇몇 대형 뮤지컬들은 작품의 규모를 키우면서 무대의 화려함에 치중하여 연극적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전혀 남겨주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관객이 화려함을 느끼면서도 상상할 여지가 있을만큼 절제된 무대를 보여준다. 위 마스커레이드 장면을 예시로 들면, 파리 오페라하우스 내부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계단 하나만 나오는데도 의상과 조명, 무대 2/3을 차지한 규모가 더해져서 사치스러운 파티 분위기를 아무런 문제 없이 연상할 수 있다. 2막 시작과 함께 원형 조명에 반짝반짝 빛나는 '마스커레이드' 의상과 군무는 단연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다. 이 외에도 배경막 하나로 표현한 '한니발' 리허설 장면이나, 분명 같은 무대 위에 있지만 다른 공간임을 느낄 수 있는 발코니 타워 등 아름다운 무대에 연신 감탄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아직도 유효한 명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넘버, 연출, 무대, 전개 등이 모두 정성스레 짜여졌다는 느낌이 들고 훌륭해서, 유령이 크리피하게 스토커 짓 할 때마다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도 공연이 끝나고 혹평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드하임이라면 모를까 웨버는 절대로 현대에 맞춰 <오페라의 유령>을 각색하는 일 따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랜 시간 군림하다 재해석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사라지는 것이 고전적인 화려함에 대한 선망으로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으는 <오페라의 유령>다운 엔딩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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