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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Peerless: The Highschool Macbeth) 리뷰: 유교걸들의 신분상승 환장파티
BIBC/빕 2020. 2. 2. 16:06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 (Peerless: The Highschool Macbeth)
공연기간: 2020년 1월 9일 ~ 2020년 1월 19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출연: 부진서, 오남영, 변승록, 정대용, 김신록
극작: 박지해 (Jiehae Park)
연출: 이오진
제작: 호랑이기운
※스포일러 있음
미국 중부 시골의 한 고등학교, 아시안계 쌍둥이가 아이비 리그 대학의 지역균형+소수인종 특별전형 입학의 원대한 꿈을 품고 전학을 온다. 1년에 한 명밖에 선출하지 않아 M이 먼저 진학하고, 가족전형으로 L까지 진학하려 L이 1년을 꿇으면서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미국 인디언 피가 1/16 섞였다는 앞구르기하면서 봐도 그냥 백인인 남학생이 덜컥 붙어버리는데... 아이비 리그를 위해선 남학생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 대박적으로 웃긴 시놉시스다. 지인에게 공연을 소개 받고(감사합니다) 시놉시스를 읽는 순간 말만 다양성의 국가지 아시안은 동류 인간으로 취급도 안 해주는 미국에서, 아웅다웅하며 무조건 대학 잘 가야 하고 그 다음 내 혈연지연까지 이끌어줘야 하는 K도터들이 있는 소수자성 없는 소수자성 끌어모아 교집합으로 명문대 가려고 시골 촌구석까지 왔는데 인디언의 인 자도 안 보이는 새햐안 남자 백인이 자기 자리를 차지했다니... 하며 M과 L이 느끼는 분노의 배경설명 필요 없이 감정이입 완전 OK다.
왜 자유석인가 했더니 블랙박스 씨어터인 S씨어터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기존 무대 구조를 완전히 뒤집어서 무대가 있어야 할 곳에 객석을 놓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를 연상시키는)기존 객석(위 사진)과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연기하는데 이게 기가 막힌다. 극이 시작할 때 객석에 백인/흑인/아시안/드러운애 이름표를 붙여놓고 각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는 걸로 극의 시작과 함께 캐릭터 소개를 내버리는데(런닝맨!?), 해당 인종을 캐스팅한 해외 프로덕션과 달리 모두 한국인이 연기하는 건데도 머리 속에 금방 박히고 효과적이었다. 특히 M과 L이 객석에 앉아서 표 들고 셀카 찍는데 KTX 타고 가면서 봐도 한국인.
M과 L이 누구냐. 선생님한텐 예의 바르고 친구들한텐 항상 이가 보이게 어린애 같이 웃어보이고 옐로피버 성향의 선생이 니하오거리는 쌉지랄도 하하호호 니하오^^ 하면서 받아주는, 인종차별 있는 국가에서 자기 손에 쥔 한 줌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서 욕지기 나오는 아시안 스테레오타입까지 써먹으며 원대한 야망을 꿈꾸는 쌍둥이다. 극중에서는 M과 L이 머리끈 정도를 제외하면 옷도 똑 같이 입고 생긴 것도 똑 같아서 남들이 구분 못 한다는 설정인데, 서양인들이 아시안들 보면 구분 제대로 못 하고 낮은 코에 찢어진 눈 정도로 퉁쳐버리는, 인종을 넘어선 개별성을 인정 받지 못한다는 걸 나타낸 듯. 그리고 이 설정이 살인하는 데 들어가면 더 재미있다^^
부제로 '하이스쿨 맥베스'가 붙어있어서 예상은 했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게 정석적인 <맥베스>였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앞 글자를 딴 M과 L 작명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 구성이나 사건 전개가 똑 같다. 사욕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자는 괴로워하며 살인이 다른 살인을 부르는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도 스릴과 몰입감을 내는 게 <피어리스>의 장점. 안 씻고 매일 이상한 소리만 해 대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드러운애'는 맥베스에게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리는 세 마녀다. 드러운애는 M에게 대학에 가게 될 거라고 예언하고, M과 L은 학교의 찐따로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백인 남학생 - 당연히 맥베스가 왕이 되기 위해 처치했던 던컨 왕이다 - 에게 호감이 있는 척 함께 집으로 가서 견과류 알러지를 이용해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L은 레이디 맥베스가 그러하듯 우유부단한 감이 있는 M을 종용해서 살인에 가담하도록 한다. 백인 남학생의 사망 후 M과 L은 쥐가 뭔가를 갉는 듯한 환청과, 인디언 워 보닛을 쓴 죽은 남학생의 환청을 보게 된다(이 또한 원작 <맥베스>와 동일하다). 살인까지 감행했지만 특별전형에는 M의 흑인 남자친구가 선정되고, L은 더 이상 살인은 안 된다는 M을 우리의 인생이 걸렸다며 그를 죽이도록 설득한다. 그 와중에 M과 L이 백인 남학생을 살해할 때 뒷켠에서 듣고 있었던 몸이 아픈 그의 형이 진실을 발설할까 두려움에 떨게 되고... 이후의 과정은 맥베스가 왕위를 차지하고 나서도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느끼과 환청을 보며 밴쿠오와 맥더프 등 살인을 반복한 것과 동일한 양상을 띈다. 결국에는 M과 L이 둘 중 하나만이 대학에 갈 수 있음을 깨닫고, 피비린내 나는 살인의 끝에 L만이 M인 척 대학에 진학한다. 그리던 대학 교정에 발을 디딘 첫 날, 다른 여자애와 친해지나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만나자 미련 없이 떠나 버린다. 결국 L은 대학에서도 자신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백인들은 시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 라티노가 내 일자리를 뺏어갔어'. 또는 시험에 떨어진 남학생이, '양성평등채용목표제 땜에 여자들이 합격 더 많이 해'라고. 아시아인-여성인 M과 L은 소수자성을 이용하여 메이저 리그에 끼려 애쓴다. 그리고 소수자로서 차별당한 경험은, 보다 상위 위계를 공격할 때 유용한 분노의 땔감이 된다. '쟤가 무슨 인디언이야 쟨 백인이지!', '그 학교 원래 흑인 많이 뽑아. 걔 너보다 성적 좆도 안 나오는데!'. 하지만 대학에 입학해서도 자신이 속할 곳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L의 모습에서 결국 소수자성은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게 느껴진다.
해외 프로덕션에서는 어땠을 지 모르나(사진을 찾으려 서치하다 보니 무대에 힘을 더 준 듯한 해외 프로덕션도 보고 싶다!!), <피어리스>는 음향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M과 L이 환청을 듣게 되면서 백인 남학생을 살해할 때 아픈 형이 듣고 있었던 상수 쪽에서 쥐가 뭔가 갉는 듯한 소리가 계속 나는데, 소리가 정말 정신을 갉아먹는 느낌이고 너무 불쾌해서 공포에 떨었다. 점프스케어 류의 값싼 연출이 없는데도 소리만으로 공포감 대박이었음. 관객 주위를 빙빙 돌며 대사를 치기도 하고 갤러리에 올라가 연기하기도 해서, 바라보는 방향을 바꾼 것만으로도 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서 지나가는 M과 L의 대화를 흘려 듣게 되거나, 배우를 올려다보면서 뭐라도 터질 듯 긴박한 상황의 긴장을 배가시키는 등 이색적인 느낌이었다.
<쓰릴 미>를 필두로 이런 살인마 듀오는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둘이서 하니까 그냥 다 너무 재미있다^^ M이 경찰조사 받을 때 자긴 못 하겠다는 걸 L이 붙잡아서 화도 내고 어르기도 하는데, 분명 어디서 다 본 장면들인데 성별이 반전된 것만으로도 너무 짜릿했음. M과 L이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관계이고 둘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원동력을 혈연이 아니라 다른 데서 찾았으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일단 혈육으로 설정해 두니 왜 그러는지 부가설명이 필요하지 않아서 효과적이긴 했다. 요즘에는 <맥베스>를 올릴 땐 레이디 맥베스에 집중하거나 레이디 맥베스와 맥베스의 관계나 비중이 역전되는 식으로 많이 재해석하는데, 그냥 맥베스도 레이디 맥베스도 여자가 하면 되는 거였음을^^... 백 점 만점에 백 점 드려요.
*원제가 너무 웃기다. 당연히 Fearless인 줄 알았는데 Peerless(비할 바 없는, 출중한)... 말 그대로 동급생Peer을 제거less해나가는 내용이라 더 웃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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