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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물섬 (National Theatre Live: Treasure Island)

원작: Robert Louis Stevenson

각색: Bryony Lavery

연출: Polly Findlay

출연: Patsy Ferran(짐 호킨스), Arthur Darvill(키다리 존 실버) 외

제작: National Theatre

손님들로 붐비는 벤보우 제독 여인숙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은 X 표시된 보물지도, 흑점, 앵무새를 어깨에 얹은 외다리 사내 등 소위 말하는 '해적 컨텐츠'의 원류가 된 작품이다. 가족이 운영하던 여인숙에서 홀연히 나타난 '외다리 해적을 겁내는' 손님 때문에 어마무시한 보물이 숨겨진 섬의 존재를 알게 된 짐 호킨스의 성장기이자, 욕심이 지나치면 살인도 서슴지 않고 결국 파멸하게 된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경고한 소설이기도 하다. 

과연 소설 <보물섬>은 당대 어린이들에게 바다로 나가고 싶은 모험심을 불어넣어 주었겠으나, '소년들만을 위한 문학'이라는 비판을 의식했는지(왜냐면 <보물섬>에 여자라고는 스쳐지나가는 짐의 어머니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 <보물섬>의 주인공은 제미마 호킨스, 애칭은 짐인 여자아이다. 부모님은 병으로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벤보우 제독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여름과 연기(Summer and Smoke)>의 알마 역으로 올리비에상 여우주연상을 탄 팻시 페란이 짐 호킨스 역을 맡았는데(너무 잘하니까 아래 영상도 한 번 보시기를), 아직 어리고, 갑작스런 상황에 두려워하면서도 바다로 나갈 생각에 부푸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짐 호킨스를 표현해냈다. 

https://youtu.be/QhKdL61JxOc

소설 <보물섬>이 그랬듯, 짐의 내레이션으로 극이 시작한다(소설에서는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듯 보물섬으로의 항해를 이미 마치고 돌아온 후인 짐이, 섬에 보물 일부를 남겨놓아 정확한 위치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재미있다). 벤보우 제독 여인숙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짐 앞에, 누가 봐도 거친 바다를 건너온 듯한 자칭 '선장', 빌리 본즈가 나타난다. '선장'은 재빠른 짐을 맘에 들어했고, 숙박비와 별개로 짐에게 용돈을 주며 '외다리 해적이 나타나면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선장' 대신 외다리 해적이 나타나는 지 밖을 주시하던 짐은 끝없이 외다리 해적의 악몽에 시달린다. 

플린트 해적단의 일원이었던 빌리 본즈와 블랙독

어느 날 블랙독이라는 해적이 벤보우 제독 여인숙을 찾아오고, 훔친 보물에 대해 '선장'과 말다툼하다 '선장'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의사인 리브지 선생(극에서 리브지 선생 또한 여성으로 등장한다)이 천만다행으로 그를 구해주고, 짐은 '선장'의 몸과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선장'이 악명 높은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의 일등항해사였으며, 보물을 숨겨둔 지도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아낸다. 블랙독은 떠났지만 옛 동료이자 맹인인 퓨가 찾아오고, '선장'은 죽음을 통보하는 흑점을 받고 죽게 된다.

퓨는 밤 10시에 다시 오겠다는 전갈을 남기고, 짐과 할머니는 죽은 '선장'의 짐을 뒤지다 '선장'이 말했던 보물지도를 찾아낸다. 보물을 찾을 기대에 부푼 트렐로니 지주는 당장 선박을 사고 선원들을 준비하고, 리브지 선생은 선의로, 짐은 사환으로 합류하기로 한다. 짐은 꿈꿔왔던 바다로 나갈 생각에 들뜬다. 

수수께끼의 조리사 키다리 존 실버

묘할 정도로 써먹을 만한 선원이 없던 차에, 트렐로니 지주는 키다리 존 실버라는 은퇴한 선원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모두 모은다. 존 또한 바다 생활이 그리웠다며 배의 조리사로 합류하고, 스몰릿 선장의 지휘 하에 히스파니올라 호는 보물섬을 향해 출항한다. 이 항해가 보물을 찾으러 가는 거란 걸 선원들이 알게 되면 딴 맘을 품을 게 분명했으므로, 이 사실은 트렐로니 지주와 스몰릿 선장, 리브지 선생, 짐만 알고 있기로 하고 리브지 선생은 사과를 보관하던 나무통 바닥에 지도를 숨긴다. 한편 짐은 외다리 존 실버를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 했으나, 스몰릿 선장과 달리 자신을 여자나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며, 친한 친구처럼 대해주는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짐에게 북두칠성으로 위도를 재는 법을 알려주는 존

순조로운 항해가 계속되던 어느 날, 짐은 사과를 먹으러 갔다가 존 실버가 자신이 모아 온 선원들과 함께 얘기하는 걸 엿듣게 된다. 존과 선원들은 모두 플린트 선장의 선원이었으나 보물에 눈이 먼 존이 플린트 선장이 잠든 사이 그를 죽이고 선장 자리를 차지했고, 블랙독이나 퓨가 그랬던 것처럼 빌리 본즈가 가져간 지도를 찾아 보물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존과 일당들은 트렐로니 지주가 모아 온 몇 안 되는 나머지 선원들을 꼬드겨 함께 선내 반란에 가담하게 한다. 짐은 사과통 바닥에서 보물 지도를 찾아내고, 믿었던 친구의 배신에 충격을 받는다. 

히스파니올라 배의 함락

히스파니올라 호는 드디어 보물섬에 도착하고, 리브지 선생과 트렐로니 지주, 스몰릿 선장과 짐은 자유시간을 주는 척 존과 선원들을 보트에 태워 섬에 내려보내고, 자신들이 배를 사수할 계획을 세운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원들은 오랜만의 정박에 기뻐하나, 자꾸 자신을 함께 섬에 보내려는 존에게 짐이 '당신은 이미 와 본 섬이지 않냐'고 말실수를 하는 탓에, 존과 선원들은 기세를 몰아 히스파니올라 호를 함락시킨다. 존이 키우던 앵무새 플린트(죽은 선장 플린트의 이름을 땄다)에게 지도를 빼앗길 뻔 했으나, 짐은 지도를 사수한 채 물에 빠지고 리브지 선생과 트렐로니 지주, 스몰릿 선장과 몇 안 되는 선원들도 섬으로 도망친다. 

섬에 버려졌던 플린트 해적단의 사환 벤 건

섬으로 헤엄쳐 온 짐은 인간인지 짐승인지 모를 기괴한 생명체를 만나고, 그가 3년 전 플린트 선장이 보물을 묻으러 섬에 데려왔다가 버려진 사환 벤 건이란 걸 알게 된다. 플린트 선장과 존은 인원 수를 줄여 보물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보물을 묻으러 데려온 선원들을 모두 죽였고, 짐은 존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 같이 벤을 똑똑하다고 치켜세우며 이용했단 걸 알게 되어 분노한다. 짐은 벤과 함께 존 일당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섬의 오두막을 차지한 리브지 선생들은 존과 해적들의 머릿수에 밀려 고전한다. 짐은 리브지 선생들과 재회해 지도를 건네주고, 벤 건과 함께 존을 무찌를 방법을 찾아내러 다시 오두막을 나선다.

죽여 죽여 다 죽여~~

한편 여전히 보물을 찾지 못한 해적들은 새로 선장 자리를 차지한 존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존은 본보기로 한 명씩 죽이면서 해적들을 공포로 제압한다. 존은 보물지도를 빼앗았으나 지도는 여전히 아리송하고, 짐을 찾아낸 존은 리브지 선생과 트렐로니 지주가 짐을 배신했다고 거짓말하며 해적단에 합류해 지도를 읽어달라고 꼬드긴다.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해적들을 위해 지도를 읽는 짐

지도에 적힌 수수께끼를 짐과 존 일당은 척척 풀어나가고, 마침내 보물이 있다고 표시된 땅굴에 도착한다. 해적들을 모두 내려보내고 존은 플린트 선장이 그랬던 것처럼, 짐에게 라이플을 쥐어주고 자신과 짐 둘만 보물을 나눠갖도록 해적들이 올라오면 하나씩 쏴 버리라고 한다. 원작에서 오십을 바라보던 키다리 존 실버와 달리 연극의 존은 <피터팬>의 후크 선장처럼 비교적 젊고 매력이 있는 캐릭터인데, 짐을 보다 효과적으로 꼬드기기 위해서 키스하며(Aㅏ..)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키스를 받은 짐은 1) 자기가 이런 걸 하기엔 너무 어리며, 2) 저 해적놈이 해적사냥꾼인 자신에게 방금 총을 쥐어줬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짐에게 키스하면 자신에게 홀딱 빠져서 친구들을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는 존의 구림과 + 단순히 여자 배우가 짐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원작과 달리 짐 캐릭터가 여자라는 특성이 드러나고 + 구린 액션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단호박으로 대처하는 짐의 단호함이 매우 호쾌했다. 

보물을 찾아나선 해적들과 짐

땅굴로 내려간 짐은 존에게 라이플을 겨누지만, 총에 익숙치 않아 금세 위기에 몰린다. 이 때 갑자기 죽은 플린트 선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존은 반신반의하지만, 본인이 아니면 모를 과거 해적단 선원들의 이름까지 호명하자 죽은 플린트 선장의 원혼이 있는 게 분명하다며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사실 이것은 벤에게 멘트를 받은 트렐로니 지주의 목소리였고, 해적들이 흩어진 틈을 타 리브지 선생들이 보물을 찾아낸다. 마지막까지 보물을 차지하려 몸싸움을 하던 존은 떨어져 죽게 되고, 짐과 리브지 선생, 트렐로니 지주, 스몰릿 선장과 벤은 히스파니올라 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짐은 항상 정직하고 주어진 몫 이상으로는 절대 받으려 하지 않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해적의 꿈을 접고 여인숙으로 돌아온다. 짐을 괴롭히던 외다리 사내의 악몽은 사라졌으나, 이제 앵무새가 외치던 "여덟 조각 은화! 여덟 조각 은화!" 소리가 짐의 머릿속을 채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주요 사건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2시간 반짜리 연극으로 만들면서 훨씬 속도감 있게 압축했다. 원작에서 존은 재판을 받으러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보물을 조금 훔쳐 도망치지만, 본 극에서 존은 좀 더 '디즈니 악당스러운' 결말을 맞는다. <보물섬>은 결국 끝 없는 욕망에 대해 경고하는 권선징악형 '순한 맛' 고전이라, 주제의식에 더 잘 어울리는 결말 같기도 하다. 

여인숙을 둘러싼 갈비뼈 모양의 구조물

세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보물섬>은 꿈과 환상을 자극하는 모험소설이니만큼 무대도 엄청난데, 위 사진에 보이는 갈비뼈 모양의 구조물들이 여인숙의 배경이었다가, 히스파니올라 범선을 때리는 파도였다가, 마지막에는 '갈비뼈 모양의' 보물섬의 지형이 된다. 또한 무대 중심의 턴테이블이 돌아갈 뿐 아니라 수직으로도 움직이는데, 위 사진처럼 배의 하부에 위치한 선실을 보여주거나 보물섬의 지하 땅굴을 표현해낸다. 미니멀한 원세트였던 <제인 에어>와 달리 전환도 엄청 많다. 실제로 봤으면 현장감과 더해져 더 압도적이었을 듯. 소설 <보물섬>에 영향을 받아 이후에 나온 해적을 다룬 훨씬 화려한 영화나 게임들이 많지만, 연극 <보물섬>은 영화의 CG와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나만 해도 소설 <보물섬>을 늦게 접해서 이미 만화 <원피스>나 게임 <대항해시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보물성>까지(아멜리아 선장님 제가 많이 사랑했어요) 본 후라 소설에서 별로 자극을 느끼지 못 했는데, 연극 <보물섬>은 현대의 시각에선 케케묵은 19세기 소설을 통해 다시금 환상과 모험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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