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마린스키 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Mariinsky Ballet: Romeo & Juliet) 후기: 유서 깊은 극장의 전통과 역사의 발레
BIBC/빕 2020. 5. 17. 14:44
마린스키 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Mariinsky Ballet: Romeo & Juliet)
작곡: Sergei Prokofiev
안무: Leonid Lavrovsky
디자인: Pytor Williams
출연: Diana Vishneva (줄리엣 역), Vladimir Shklyarov (로미오 역), Alexander Sergeyev (머큐시오 역), Ilya Kuznetsov (티발트 역), Islom Baimurado (벤볼리오 역) 외
모스크바의 볼쇼이에 비견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코로나 셧다운을 맞아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개했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하면 영국 로열 발레단의 케네스 맥밀란, 영국 국립 발레단의 루돌프 누레예프 등의 안무를 떠올리게 되는데,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2013년 공연된 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기적으로 최초로 상연된 공연이라 할 수 있는 라브로프스키의 버전이다.
www.youtube.com/watch?v=Z_hOR50u7ek
아마 어디선가 한 번 들어봤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Dance of the Knights.
영상 시작부터 금칠한 로고에 파베르제의 달걀 오프닝까지 돈을 철철 발랐다는 느낌이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정말로 14세기 베로나 귀족들이 입었을 법한 매우 알록달록한 의상과 눈 돌아가는 화려한 패턴의 막을 보고 있자니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정교한 디오라마를 보는 듯 하다. 라브로프스키 버전이라 그런지 현대에 맞게 재해석된 부분은 하나도 없고 발레를 모르는 사람(나)이 '발레'하면 떠올릴 수 있는 클래식함을 모두 쏟아부었다.
줄리엣 역의 다이애나 비쉬네바와 로미오 역의 블라디미르 슈클랴로프가 오페라글라스를 안 갖다 대도 '저 둘이 주연이구나' 싶게 예쁘고 잘생기고 몸선이 달라서 다소 지루하게 전개됨에도 눈을 못 떼고 봤다. 줄리엣은 유모랑 그냥 베개 갖고 장난 치는 장면에서도 혼자 엄청나게 날아다니더니 줄리엣 바리에이션 때는 우아함을 몸으로 정의 내리는 듯 한 춤을 보여줬다. 로미오는 너무 순종적으로 잘 생긴 미남이라 줄리엣이 한 눈에 반한 거 이해하게 됨
사실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애달픈 사랑 이야기라 좋아하는 것보다는 얼토당토 않게 첫눈에 반해서 손잡고 파멸로 달려나가는 두 젊은이(누구나 다 이걸 제일 재미있게 보지 않나?!)와 그 운명을 심화시키는 싸움꾼 두 명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 프로덕션의 티발트가 정말 MSG 팍팍 뿌린 캐릭터라 매우 즐겁게 봤다. 낭창낭창한 머큐시오는 시종일관 우아하게 비웃음을 흘리고 다니는데 몸집이 그의 1.5배나 되는 분조장 티발트가 온 안면 근육을 자유자재로 일그러뜨리면서 분노폭발하는 거 너무 재미있었다. 머큐시오랑 티발트 캐릭터를 대비되게 잡아놓아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음. 그리고 티발트가 로미오한테 칼 맞고 나서 분노로 튕겨올랐다가 죽어버리는데 그런 연출에서 오는 자극 같은 게 진짜 셌다(캐릭터 죽는 거 너무 좋아 비참하게 죽으면 더 좋아).
큰 동작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각)죽음 신이 인상 깊었다. 발레 동작에 도식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와 달리 죽음 신에서는 정말 순수한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심지어 로미오는 독약을 마시고 줄리엣의 손등에 마지막으로 키스한 뒤 저 계단을 굴러 떨어져 죽는다... 얼마 전에 영국 국립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볼 때는 너무 잔잔해서 계속 졸았는데 이 프로덕션은 계속해서 자극을 막 제공한다. 뒤늦게 깨어난 줄리엣은 계단 밑에 엎어진 로미오를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로미오가 깨어나지 않자 독약을 미친 듯이 입에 털어넣지만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자 로미오에게 안기려는 듯이 그에게 쓰러져 팔로 자신을 덮는다. (사실 그냥 개인적으로 죽음 신을 진짜 좋아하기도 한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 때로 타임슬립하여 보고 있는 듯한 고전적인 작품이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하고 특히 2, 3막에 인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서 2시간 반을 본 보람이 있었다. 이번에 해외 극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좋은 발레 작품을 영상으로 많이 접해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발레 공연을 좀 더 많이 보러 가야겠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슈퍼주니어 비욘드 라이브 Beyond the Super Show 후기: 현 판데믹 시국에서 가장 고무적인 공연 콘텐츠 (0) | 2020.05.31 |
---|---|
멀베이니 가족(조이스 캐럴 오츠) 후기: 한 가족의 비극을 지켜본다는 것 (0) | 2020.05.25 |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Northern Ballet 1984 후기: 발레로 구현된 전체주의 국가 (0) | 2020.05.05 |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영국 로열 발레단 '변신' (The Metamorphosis) 후기: 인간의 육체가 자아내는 기괴함 (0) | 2020.04.30 |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NT Live 보물섬 (Treasure Island) 후기: 파도치는 낭만의 시대, 욕망이 들끓는 섬 (0) | 2020.04.30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