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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알앤제이(R&J)

일자: 2019.06.28 ~ 2019.09.29

장소: 동국대 이해랑극장

원작: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 각색: Joe Calarco / 연출: 김동연 / 대본: 정영 / 음악감독: 김경육 / 기술감독: 박지영 / 조명디자인: 최보윤 / 음향디자인: 권지휘 / 무대디자인: 박상봉 / 의상디자인: 도연 / 분장디자인: 김민경 / 소품디자인: 김혜지 / 안무감독: 송희진 

주최: SBS / 기획제작: 쇼노트 

*스포일러와 불호후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일과와 규율, 가차 없는 훈육으로 가득 찬 가톨릭 남학교, 네 명의 소년이 늦은 밤 기숙사를 빠져나와 금단의 책 <로미오와 줄리엣>을 꺼내든다. 소년들은 금지된 사랑을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자 배역을 정해 차례대로 낭독하며, 희곡 속 인물들의 삶에 깊게 빠져들게 되는데...

리뷰의 첫 문장부터 찬물을 끼얹어 미안하지만, <알앤제이>의 시놉시스를 읽으면 <죽은 시인의 사회>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알앤제이>를 보기 전부터 머릿속엔 온갖 편견과 부정적인 인상으로 가득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남학교 설정에(<어나더 컨트리>, <히스토리 보이즈>, (남학교는 아니지만)<베어 더 뮤지컬>, <모범생들> 등등등) 젠더스왑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남자배우 4명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것도 퀴어베이팅 극인가? 좌석에 앉는 그 순간까지 선입견은 계속됐다.

호평을 많이 들어왔던 무대는 단연 예뻤다. 점점 더 <죽은 시인의 사회>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4명의 학생이 군인처럼 발을 구르며 틀에 박힌 엄격한 카톨릭 학교 생활을 표현한 연출도 최근에 본 창작/논레플리카 연극 연출 중 가장 세련되고 좋았다(파렴치한 반바지와 더불어 오탁구의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었음). 

일단 <알앤제이>의 배경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퀴어 극으로 자주 재해석되고 수간과 외도가 난무하는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청춘과 욕망에 빠진 이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 카톨릭적 색채가 강한 <로미오와 줄리엣>을(셰익스피어는 당시 개신교를 국교로 삼고 카톨릭을 금지하였던 영국에서 클로짓 카톨릭이었다는 해석까지 도는 작가다) 금서로 지정했다는 것이, 그리고 금서 규정이 너무나 잘 지켜져서 20세기의 학생들이 몇 백년 간 <로미오와 줄리엣> 스포를 하나도 당하지 아니하고 천연 상태로 읽을 수 있다는 게 일단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꼽자면 구약이 더 충격적이지 않나요...? 차라리 뭐 <마담 보바리>나... 하다못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다고 하거나... 로미오가 추방 당하고 줄리엣이 파리스랑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읽고 있던 학생n이 충격 받아서 책 떨구는 거 진짜 너무 웃기다.

시대와 주인공만 바꾼다고 재해석이 아니다

<알앤제이>는 여러모로 성공적인 재해석을 하지 못한 연극이다. 카톨릭 학교의 엄격한 가르침을 보여주기 위해 학생들이 번갈아가며 '순결한 것이 여자의 권리'라든지 '부드럽게 남자를 복종시키는 것이 여자의 의무' 등등(사실 빡쳐서 제대로 기억 안 남) 교과서의 카톨릭적 빻은 소리들을 소리 내어 읽는데, 기만적이기 짝이 없다. 이 남자들이 뭔데 그걸 읊는가? 여자인가? 여자로 정체화한 남자들인가(이랬어도 화날텐데 심지어 이것마저 아님)? 아니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며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얼마나 억압적이고 불공평했는지를 말하나? 그것도 아니다. 1차원적으로 생각해봐도 <알앤제이>에는 여자가 아무도 없으니 이런 규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심지어 극의 메시지(솔직히 말하면 나는 극의 메시지를 이해 못 했다)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만적이라고 느꼈던 건 학생2가 줄리엣을 연기하면서, 줄리엣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폭력을 자신이 당한 일과 겹쳐 생각하는 장면이었다. 특히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성이 사유재산처럼 출가하면 남성의 가문에 종속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이 용납될 수 없던 거였고, 남성에게 거역할 수 없고 결정권이 없는 줄리엣의 처지가 강조되어 나오는 작품인데도 이런다.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남자인 학생2가 감정이입하고 비빌 폭력의 결이 다르지 않나.

극중극? 아니면 그냥 연극부?

<알앤제이>는 무려 150분(연극인데!)의 러닝타임을 자랑하고, 인터미션 빼면 130분인데 체감상 110분 정도를 <로미오와 줄리엣>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옮기는 데 주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맥베스>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그 긴 연극을 대사 하나, 장면 하나 건너뛰는 일 거의 없이 그대로 읊는다. 그럼 학생 넷이 <로미오와 줄리엣> 그대로 연극 올리는 거만 줄창 보고 있다가 극이 끝나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굳이 20세기에 굳이 남학생(!)들을 데려다 재해석하게 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그대로 읊을 거면 뭐가 재해석이지? 초반의 학교생활을 묘사하는 장면과 후반부 현실로 돌아가는 엔딩 장면을 제외하면, <알앤제이>는 연극 외 학생들의 삶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알앤제이>를 보고 <죽은 시인의 사회> 아류작인 것처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사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하고 싶은 거였다. 학생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며 점점 인물들에 이입하게 되고 자신들의 현재에 불만과 균열을 느끼게 되는... 시놉시스만 읽어도 의도는 너무 명확한데 그러려면 중점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엔딩까지 달리는 게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학생들의 외부 현실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에 뒀어야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낭독은 1막 쯤에서 끝내고 작품의 메시지를 상기할 만한 외부적 사건이 터지든가,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과 현실의 사건을 왔다갔다하면서 전개했어야 한다. 후자를 목표로 한 것 같긴 한데, 너무 미미해서 지금 저 학생이 갑자기 대사를 구리게 치는 게 낭독하는 작품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자각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연기를 못 해서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리고 한 순간 배우들이 흠칫, 하는 정도로 외부세계와 극중극을 이어주는 거라고 할 참이라면 아마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해 못 할 거다. 그리고 너나우리가 모두 아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읊기만 하니까 연극은 2시간 반이나 되는데 재미가 너무 없다. 여기서 로미오랑 줄리엣 죽는 거 모르는 사람...? 생각해 봤는데 보통 이런 학교 배경에 이런 인원 구성이면 학생 1234 중에 3쯤이 도중에 사고든 자살이든 해서 죽어야 되는데 아무도 안 죽어서 재미가 없는 듯.

도대체 무엇에 (과)몰입을 한 거지?

이러니, 마지막 장면에 학생1이 꿈을 꿨다고 절규하는 걸 보고는 저렴하게 표현해서 '과몰입 애진다;' 이 생각밖에 안 드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며 뭘 느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상식적으로 이런 극중극을 진행할 경우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외부 현실을 대응할 때 그에 맞춰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여줄 수 있도록 연출하지 않나 보통???) 나는 학생2가 왜 우는지 학생1이 왜 현실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거다. 1막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은 학생1과 2가 하도 달달하게 연기를 하길래 낭독하다가 진짜 사랑에 빠졌나? 했는데 딱히 그것도 아니었다... 퀴어베이팅하는 극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군요 거참 감사하게도... 학생2가 연극하다가 이입해서 심하게 울거나, 더 읽기 싫어하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이 책을 쥐어주거나 하는 장면들을 지금껏 공연 봐 온 짬바로 '흐름상 저래야 한다'라는 건 느껴지는데 왜 그러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정말 진심으로 내가 공연 이해도가 떨어진 건가, 남자가 아니라서 이해 못 하나(!) 까지 생각했음. 낭독하다가 성 정체성을 깨달은 것도 아니고 사회에 굴하지 않는 강렬한 사랑에 통감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규율에 통제 당하는 학생들이 읽고 눈 뜰 만한 다른 더 적합한 책이 천지빼까린데 왜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리고 마지막, 심지어 <알앤제이>의 부제인 '우리가 친구라면 손을 잡아' 대사에서는 정말 벙 찔 수 밖에 없었다. <알앤제이>가 뭘 말하려는 지는 모르겠으나, 사랑 억압 해방 뭐 기타 등등등 있다 치면 그 중 우정은 가장 마지막이 아닐까요? 

한 가지 더 보면서 화딱지 났던 점을 말하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려 전막을 공연해야 하므로 로미오와 줄리엣 말고도 로렌스 수사, 레이디 캐퓰렛, 벤볼리오, 머큐시오 등등 전체 등장인물을 학생들이 나눠 1인 다역하는데(안 나온 건 티발트 추종자 페트루키오 정돈 듯 그리고 페트루키오는 원래 말이 없다) 머큐시오나 티발트는 그으으으으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각잡고 멋있게 연기(솔직히 좀 과해서 웃겼음; 특히 머큐시오)하던데 유모랑 레이디 캐퓰렛은 과장되게 희화화(양손 들고 팔랑거리며 걸어다니기, 목소리 톤 과장스럽게 높이기 등)해서 10분을 통째로 할애한다. 유모랑 레이디 캐퓰렛은 심지어 대사도 많은데, 그 둘은 계속 그 꼬라지로 연기를 하다가 나중에 머큐시오 죽고 티발트 죽고 여튼 죽고 죽고 죽어서 극 중 아무도 웃지 못 하게 될 때쯤에야 좀 사람다운 연기를 한다. 이걸 심지어 남자배우가 한다. 연출 제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시국에.

상징적인 붉은 천을 활용한 연출은 기대 이하였다. 멋진 장면이 분명 있었으나(첫날 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감싼 천, 전투의 광기에 휩싸인 머큐시오가 티발트에게 싸움을 걸기 전 천을 휘날리는 장면 등) 예상 가능한 범위 내였고, 반복적으로 나오는 줄다리기...는 그게 최선인가요? 생각만 들었다. 객석까지 널리 퍼져 있는 동선이나 무대활용은 좋았지만,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큰 극이었다.

보고 상처만 남아버린... 남자배우만 나오는 극 + 젠더프리는 젠더프리인데 남자가 여자 역까지 할 거에용~~ 하는 극들에 대한 편견을 한 번 더 강화해준 <알앤제이>. 얼마 전에도 <줄리엣과 줄리엣>을 보고 인지도만 쏙 골라 먹은 아쉬운 재해석이었다고 리뷰한 적이 있는데, 내 생애 실패한 <로미오와 줄리엣> 목록(이미 길다)에 남아 버렸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제발 보는 데 재미라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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