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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딜릴리
원제: Dilili à Paris
감독, 각본: 미셸 오슬로 Michael Ocelot
시놉시스: 문화적 정점에 도달한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 의문의 조직 '마스터맨'에 의해 어린 소녀들이 연이어 납치 당한다. 배달부 소년 오렐은 파리 도심의 '인간 동물원'에 출연하던 프랑스-카나키 혼혈의 소녀 딜릴리와 친구가 되고, 둘은 아름다운 파리 곳곳을 모험하며 유명 인사들과 만난다. 마스터맨이 딜릴리를 노리고, 딜릴리와 오렐은 마스터맨의 음모를 저지하기로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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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시대(1900~1909)의 파리 -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하는 낭만적인 시대와 공간이다. 이 시기의 파리는 살아있는 미술관, 박물관과도 같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처럼, 딜릴리와 오렐의 모험에는 로댕, 로트렉, 르누아르, 사라 베르나르, 심지어 마리 스쿼도프스카와 파스퇴르까지 각종 유명인사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파리의 딜릴리>에서 제일 처음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동물원'이다.
파리 교외의 뱅센 숲에는 100년 전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식민지 마을들을 재현해 대중에게 선보였던(현대의 용어로는 '인간 동물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건물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테이스트를 찾아 헤매던 유럽인들에게 신체 그 자체로서 전시되었던 '호텐토트의 비너스' 사르키 바트만(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6777&cid=59020&categoryId=59027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처럼, 1870년대 프랑스는 당시 식민지배했던 나라들(마다가스카, 수단, 인도차이나, 콩고, 튀니지, 모로코)의 현지 삶과 문화를 재현하여 인공적으로 마을을 건립하고 식민지인들을 데려와 살게 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관람하게' 했다고 한다. 파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19세기 중순부터 1930년대까지 유럽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배 받던 국가의 3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파리, 런던, 베를린 등으로 끌려와 관람 목적을 위해 전통 의복을 모방한 옷을 입고 전통 행사 등을 흉내내고, 심지어 유럽 박람회에도 이러한 마을들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딜릴리는 프랑스인과 카나키인의 혼혈로, 고향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덜 짙은 피부색 때문에 외지인 취급을 받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국적인 소녀로서 인간 동물원에 전시된다. 파리의 여느 아름다운 공원에서 딜릴리는 비슷한 피부색의 다른 사람들과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전통적' 생활을 재현하고, 공연이 끝나고 나면 어느 백작 부인의 비호 아래 고급 드레스를 입고 수준 높은 불어를 구사하며 오렐은 쳐다도 못 볼 고급 마차를 탄다. 영화 내에서 백작 부인의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백작 부인이 딜릴리에게 가정교사를 붙이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제공하면서도 인간 동물원 공연을 하게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백작 부인이 딜릴리를 데리고 사는 이유가 굉장히 불순함은 당연해 보인다.
딜릴리를 납치하려는 마스터맨이 접근해오면서, 딜릴리와 오렐은 마스터맨을 쫓기 위해 자전거에 함께 타고 파리 곳곳을 다니며 유명인사들과 대화하면서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는다. 물랑루즈에서는 캉캉댄서들을 그리는 로트렉을, 팔레 가르니에의 지하 호수에서 노래를 부르는 엠마 칼베(당연하게도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에서 영향을 받았다. 엠마 칼베는 <파리의 딜릴리>의 유명인사들 중 유일하게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를, 로댕의 작업실에서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을 만나는 식이다.
딜릴리와 오렐은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보석(심지어 1906년 설립된 쥬얼리 브랜드 반클리프 앤 아펠)을 훔치려는 마스터맨 2명을 붙잡고, 딜릴리가 파리에서 제일 가는 유명인사가 되며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였다. 하지만 백인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에 심하게 물들어 있는(라기보다 아마 그 시대 백인들이 전부 그랬을 듯. 오히려 영화 속에서 딜릴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너무 편견 없이 딜릴리한테 친절하게 굴어서 이상했다) 엠마의 운전사 르뵈프가 마스터맨이 되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딜릴리를 납치해 조직에 넘긴다.
파리의 지하 도시 카타콤베에서 조직의 우두머리(마스터맨, 아래 사진에서 보라색 옷 입은 놈)를 만나게 된 르뵈프는 마스터맨의 목적을 알게 되는데, 그 마스터맨의 목적이라는 것이 아주 기가 막힌다: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실제로 감독 미셸 오슬로는 벨 에포크 시대인 1900년대 초반을 '프랑스에서 여성 최초의 성취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로 설명했다 - 1903년 마리 스쿼도프스카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00~1903년 시도니 콜레트가 남편 이름으로 첫 소설 연작 출간(1910년에는 판토마임극 <Rêve d'Égypte>에서 콜레트가 주연하여 동성 연인과 키스 신을 선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도 1880년대 후반 ~ 1900년대 초반 활동) 여성의 권위가 커지고, 반대급부로 남자들의 힘이 추락했다. 마스터맨은 여자들을 납치하여 '네 발'이라고 부르며 검은 천을 두르고 땅바닥을 기게 하며 남자들을 위한 의자나 테이블 대신으로 쓴다. 원래는 성인 여성들을 납치했으나, 더 다루기 쉬운 어린 여자아이들을 납치하여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고 사회에 내보내서 현재의 여성들을 '네 발'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은가? 마스터맨들은 파리의 일베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마스터맨들이 현대까지 이어져 와서 일베가 되고 IS가 되고 그러는 것이다. 분명 전체관람가로 알고 있는데 인간 동물원부터 시작해서 '네 발'까지 너무 역겹고 무서웠다. 그리고 나는 <프린스 앤 프린세스>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이란 것만 알고 틀었는데 본격적인 여성주의 영화라서 놀랐다. 왜 아무도 이걸 말해주지 않은 것인지?? 네이버 영화소개에 들어가도 인간 동물원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프랑스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 영화를 어떻게 '낭만의 도시 파리로 떠나는 동화 같은 여행' 이런 카피로 팔 수가 있는지?
자기도 백인 쓰레기지만 마스터맨은 자기가 보기에도 아니다 싶었던 르뵈프는 눈을 뜨고, 엠마와 오렐에게 자신이 딜릴리를 납치했음을 실토하고 딜릴리를 함께 구해내기로 한다. 하수도로 몸을 던져 용감하게 탈출한 딜릴리를 엠마와 오렐, 르뵈프가 구해내고, 엠마는 당대의 여성 스타들 - 노벨 물리학상 수상 과학자 마리 스쿼도프스카와 무정부주의자이며 교육자이자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 '파리 코뮌'의 요인 루이즈 미셸, '여신'으로 불리던 19세기 최고의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알폰스 무하가 그린 공연 포스터들의 주인공으로도 친숙하다) - 을 불러 마스터맨을 해치울 방법을 논의한다. 경찰청장마저 마스터맨의 일원임으로 밝혀져, 딜릴리들은 경찰이나 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19세기 후반의 발명품인) 동력 비행선을 타고 마스터맨 아지트의 굴뚝으로 내려가 소녀들을 구출하기로 한다.
딜릴리와 오렐, 르뵈프는 굴뚝으로 내려가 소녀들을 구출하고, 마스터맨의 아지트에 불을 지른다. 굴뚝으로 내린 사다리를 타고 탈출하라는 말에 교육 받은 것처럼 네 발로 기던 소녀들에게 딜릴리는 이렇게 말한다: 두 발로 뛰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발로 기지 마.
소녀들을 태운 비행선이 실종된 아이들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에펠탑 위를 날아가며 엠마는 아름다운 노래를 선보인다. 밤의 에펠탑이 빛나며 에펠탑 중간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의 내부가 보이고, 비행선은 조명이 켜지고 꽃가루가 날리고... 비주얼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긴 한데, 만국박람회의 상징 에펠탑에서 부자들이 식사하면서 '아이들이 돌아왔대요 잘됐네요~'라며 박수나 치고,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엠마 칼베는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고 노래하는데(레스토랑 앞에서 노래함) 아마 에펠탑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만큼 여유롭지 않을 실종된 아이들의 부모는 에펠탑 아래에서 기다린다... 이거 너무 기만적인 장면 아닌지? 뭐든 낭만으로 팔아치우는 저 부르조아놈들<이런 마음이 막 들게 됨.
<프린스 앤 프린세스>, <아주르와 아스마르> 등 독특한 3D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주목 받았던 미셸 오슬로의 작품답게, <파리의 딜릴리>도 독특한 화면을 선보인다. 옷이나 머리카락 등 3D 모델은 그림자 없이 단색 컬러로 표현되고, 풍경에는 미셸 오슬로가 4년에 걸쳐 찍은 사진들을 텍스쳐 매핑(2차원의 그림을 가상의 3차원 물체의 표면에 적용하고, 실제의 물체처럼 느껴지도록 세부 묘사를 하는 것 - 위키백과)해서 그대로 입혔다(그래서 보고 있으면 파리 관광청 홍보영상 같다 - 이 사건은 허구지만 파리에 오시면 지금도 이 건물/조각/그림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답니다!).
<파리의 딜릴리>는 가장 화려했던 시대의 파리를 딜릴리와 오렐이 누비는 어드벤쳐물임에 동시에, 제국주의의 오만함과 잔인함이 극에 달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지위에 위협을 받은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고 폭력을 가한 시대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마스터맨의 발상이 너무 끔찍한 데(그래서 묘하게 현실적) 반해 해결하는 과정이 안일하게 느껴지지만(그래도 파리는 아름답다!로 귀결되는 듯 하다), 벨 에포크 시대를 그저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파리는 너무 아름답긴 하다... 파리는 세계에서 낭만을 제일 잘 팔아먹는 도시고 프랑스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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