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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스포일러 완전 다 스포일러

마블 <제시카 존스>는 기존에 익숙한 <어벤저스>나 <엑스맨> 타이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시리즈다. 헐크니 토르니 하는 히어로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반 사람들과는 크게 관계가 없고, 딱히 외계인이 침공해오지 않아도 뉴욕은 여전히 살기 팍팍한 동네다. <제시카 존스>에도 초능력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폭력을 풀어낸 느와르 탐정물로, <러브 섹스 로봇>이나 <폴라> 같이 유독 자극적으로 뽑아내던 다른 성인용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제시카 존스는 배우자의 외도 현장 등 남의 더러운(그리고 시시껄렁한) 사생활을 캐내서 돈을 버는 사립 탐정으로,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심한 알콜중독에,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애정을 받기 무서워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또한, 제시카를 제외한 가족이 전원 사망에 이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후부터 괴력이 생긴 초능력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제시카의 탐정 사무소에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고, 실종된 여성 호프의 자취를 좇던 제시카는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장본인 킬그레이브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킬그레이브는 마인드 컨트롤러로, 자신이 내뱉은 말대로 일정 시간 동안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 남자 열댓은 손쉽게 해치우는 제시카의 능력에 이끌려 제시카를 조종했고, 애인 행세를 하며 인형처럼 데리고 다녔다. 킬그레이브는 가스라이팅을 눈에 보이는 능력으로 확장, 변형시킨 괴물이다. 킬그레이브의 능력은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군중을 이용한 텐션 넘치는 장면을 형성하는 효과적인 장치이지만, 여성 피해자와 엮였을 때 가장 끔찍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좋은 호텔에 묵으며 강간한다. 상대방은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지만, 아무 저항 없이 따르게 된다. 킬그레이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므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시카 존스>를 보게 된 이유의 50%는 킬그레이브 때문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가스라이팅 이겨내는 내용이야->그런데 킬그레이브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 함. 이런 식으로 영업을 당했다. 보기 전부터 걱정을 많이 하긴 했다. 킬그레이브 덕질하면 어떡하지? 지금껏 수트 차려 입은 개새끼 백인 남성 악당 캐릭터를 얼마나 많이 덕질해 왔던가. 그리고 항상 메인 빌런 연출이 제일 까리한 법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의도적으로 제작진이 킬그레이브를 혐오할 수 밖에 없는 한심한 캐릭터로 만들고 배우도 충실히 연기해준 덕에, 마지막까지 킬그레이브를 혐오하며 시즌을 끝낼 수 있었다.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 아니라, 제작진이 캐릭터 조형 단계에서 킬그레이브에게 동정심이나 매력을 느낄 수 없도록 신경 쓴 티가 난 점이 좋았다. 물론 킬그레이브는 보는 재미가 있다. 어디로 튈 지 모르고, 항상 참신하게 능력을 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킬그레이브는 절대 면죄부를 받지 못하며, 쿨하고 비정한 악당이 아니라 한심하고 역겨운 쓰레기이다. 킬그레이브가 제시카에게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우린 한 마음이 될 거라고 입 터는 장면... 우린 모두 이 장면을 알고 있다. 아마 대부분 집 앞으로 찾아오던 또는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던 전남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서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킬그레이브는 어디 정계나 재계에 들어가 세상을 주무르는 것도 아니고 그 기똥찬 능력으로 축구 보면서 욕이나 하고 중식 레스토랑 가서 파스타나 시켜 먹는다. 킬그레이브가 헛소리 할 때마다 듣는 내가 부끄러워서 얼른 죽으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고 그런 면에서 매우 만족했다. 

보면서 좀 전개가 괴상한 지점이 많았고, 안물안궁한 트리샤의 남자친구 얘기에 너무 큰 열을 쏟는 바람에(아마 시즌 2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중도하차할 뻔 했지만, 시즌 1 피날레를 보고 너무 좋아서 억지로 꾸역꾸역 봤던 시간이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킬그레이브는 결국 제시카를 다시 조종하지 못했고, 지독한 가스라이팅에서 생존했고 그 후유증을 하나씩 하나씩 극복하던 제시카는 결국 킬그레이브가 자신에게 했던 말처럼 "웃어"라며 킬그레이브의 목을 통쾌하게 꺾어버린다. 킬그레이브가 제시카를 처음 만나서 정신을 지배하고 최초로 요구한 것도 '웃으라'는 거였고, 선착장에서 제시카를 다시 손 안에 넣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최초로 요구한 것이 '웃으라'는 거였다. 킬그레이브에게 조종 당하기 전에도 제시카는 딱히 방긋방긋 웃고 다닐 만한 성격도 상황도 아니었다. 괴력으로 사람을 구하던 여자에게 '웃으라'니, 얼마나 좆같은 말인가? 여성을 웃는 인형 이상으로 보지 않는, 딱 킬그레이브 같은 새끼들이나 할 법한 말이다.

숙적 킬그레이브를 죽이던 그 순간, 제시카의 곁에는 누가 있었나? 묵묵히 곁에서 제시카를 도와주던 트리샤가 있었고, 체포된 제시카의 곁에는 한 때 킬그레이브에게 이끌려 처참한 실수를 저질렀으나 자신의 죄를 만회하려는, 앞으로도 만회하려 할 호가스가 있었다. 특히 피날레에서 한 걸음 나아간 제시카와 트리샤의 관계의 발전이 너무 좋아서 꽹가리를 치고 싶다. 실은 언제 어느 때고 제시카의 전화 한 통이면 제시카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오던 트리샤의 캐릭터가 딱히 재미있게 조형됐다고는 할 수 없고 특히 재수 없게 구는 남친 심슨 경관 때문에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제시카는 이 때만큼은 트리샤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빼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 힘을 합쳐 킬그레이브를 죽이기 위해 트리샤와 함께 전장에 나간다. 제시카는 자신이 킬그레이브에게 조종 당하지 않고 제정신이란 걸 트리샤에게 알려주기 위한 암호를 정한다. 자신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제정신이라면 트리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킬그레이브의 요구에, 정확히 트리샤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한 제시카는 킬그레이브를, 자신의 트라우마를 날려버린다. 완벽한 피날레가 아닐 수 없다.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변인들을 밀어냈던 제시카는 이제 트리샤의 도움과 애정을 받아들일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 서로의 삶에 개입할 것이다. 결함 투성이의 여성들이 서로의 뒤를 봐주고, 루크와 심슨은 기절해서 어디 꼬나박혀 있었다는 점도 매우 만족스럽다. 

제시카는 결함투성이 인간이다. 인간관계에 서툴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상처 입히며, 혼자 도망치려 하고, 조종 당했으나 어쨋든 자신이 죽인 여자의 남편에게 이를 비밀로 하고 같이 잔다. 제시카에게 일을 의뢰하는 변호사 제리 호가스는 어떤가? 몸매 좋고 젊은 내연 상대를 위해 헌신적인 배우자를 내쳤으며, 위자료를 덜 주려고 더러운 술수를 쓴다. 트리샤는 과거 유명 아역탤런트로 약물중독이었고, 스테이지 마더였던 엄마와 이슈가 있다. 아니 사실 트리샤의 오점은 심슨이다. 심슨 같은 새끼를 애인 삼았다는 거다. 하지만 이들 모두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 발씩 나아간다(트리샤가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 

<제시카 존스>는 가스라이팅과 성폭력 피해자 제시카 존스가 보고 있기 답답할 정도로 끊임 없이 실수하고, 실수를 반복하고, 조금씩 이겨내가는 과정이다. 킬그레이브를 사지로 몰기 위해 제시카가 하는 선택들은 마블 히어로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비윤리적이기도 한데, 그게 <제시카 존스>가 짜릿한 쾌감을 주는 지점이다. 킬그레이브 같은 불연소 쓰레기는 탈 때까지 태우다가 폐기해야지 언제까지 윤리 생각하며 클린하고 예의 있게 대하겠나?또한 <제시카 존스>는 주인공 제시카의 성장과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도 만족스럽다. 세계 평화를 위해 킬그레이브는 없어져야 마땅하긴 하지만, <제시카 존스>가 조명하는 것은 제시카가 어떻게 도시를 지키냐가 아닌 제시카가 어떻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가이다. <어벤저스 - 엔드 게임>이 정말 현실세계의 끝인 마냥 분위기가 과열되는 것이 마뜩찮았던 참에 <제시카 존스>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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