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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포스터. 누가 저 대비되는 자세 좀 봐주세요.

오랫동안 사랑 받은 소설을 영상화할 때 가장 화나는 일은, 다른 매체로 만든답시고 쓸데 없이 붙는 사족일 것이다. 괜히 스케일도 키우고 싶고, 오리지널 캐릭터(으아아악!!)도 넣어보고 싶고... 그런 면에서 아마존 스튜디오의 <멋진 징조들>은 완벽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원작의 전개와 대사를 최대한 살리면서 팬들이 원하던 뒷이야기만 쏙쏙 넣어줬는데, 그게 심지어 원작자(의절반)피셜이다!

<멋진 징조들>은 둘이 6천년간 썸타다가 겨우 사귀는 이야기다. 

 그래서 원작자가 생각하기에 30년 만에 자기 소설을 영상화하는 데 소설에서 제일 부족했던 것이 뭐냐.... 하니 '아지라파엘과 크롤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뭘 어떻게 지지고 볶았기에 이렇게 운명의 쏠메가 되었는가'이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시즌 1(시즌 1로 끝인데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왜 나 설레게 시즌 1이라고 굳이 명명하는가? 이럴 거면 시즌 2 내놔라?) 3화에서 장장 30분, 6,000년에 걸쳐 전 세계 각국에서 맞닥뜨리는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을 그리고 있다. 먼저 반한 놈이 진다고,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불도저처럼 돌진해서 구해주러 오는데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에게 사랑 받는 천사 아지라파엘은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모르다가 자신을 구하러 축성된 땅까지 밟으며 다닥다닥 구워지는 오징어마냥 통통 튀어오르는 크롤리를 보고, 드디어 이 악마에게 반하게 된다.

거짓말일 것 같은가? 진짜다. 작가가 헤테로 남자라고 자기 캐릭터들로 브로맨스 안 팔 것 같은가? 남자들이 더 한다. 

아지라파엘 패션 이게 최선이냐?

덕분에 둘의 관계 양상도 상당히 바뀌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지지고 볶아서 '난 천사고 넌 악만데ㅠㅠ' 하는 레벨은 애저녁에(르네상스 즈음에?) 지났고,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권태기 부부 같이 보이던 소설 속 크롤리와 아지라파엘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아직도 매일매일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며 썸을 타는 중이다. 특히 크롤리가 아주 불도저다 순정에 미친 처돌이가 되어버렸다. 아지라파엘의 서점이 불탄 후 굉장히 드라이했던 원작과 달리 크롤리는 내 절친이 죽었어(천사는 죽지 않는다)며 비이성적인 말을 하고, 아지라파엘의 환영(아니다 진짜 아지라파엘이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에 반해 아지라파엘은 차갑기 그지 없다 같이 지낸 게 몇 세긴데 아직도 난 천사고 넌 악마야 우리 갈 길 가자 ㅃㅃ 이걸 반복하고 있는가? 반복이란 게 중요하다 반복이. 너네 그렇게 싸우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만나는 거 아니냐?

아무튼, 지나치게 상세한 브로맨스 발전의 과정이며 '내 절친이 죽었어!'라고 외치는 크롤리 등, 2차 창작에 나올 법한 요소들이 원작자가 참여해서 번복할 수도 없게 공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드라마로 만들면서 몇몇 위트 있는 원작의 대사나 장면을 잘라냈지만,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의 우정은 부가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닐 게이먼.

(심지어 드라마는 약간 심심하게 끝나는 아마겟돈의 스케일을 더 키워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선사한 것은 이 가증스럽고 꿀 떨어지는 부부사기단이 어떻게 감쪽 같이 천국과 지옥을 속여넘겼는가이다.)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이 파일을 저장한 이름은 쌍놈쌔끼.jpg다.

원작에 비해 비중을 늘린 가브리엘과 바알세붑도 탁월한 선택이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넌 노오력이 부족해!'로 모든 말을 끝낼 것 같은 가브리엘은 보자마자 '아 천국에 사는 새끼들은 다 저런가?' 싶은 느낌을 주며 지상을 좋아하는 아지라파엘에게 오조오억번 공감하게 된다. 바알세붑은 너무... 멋있다... 인외.... 

하지만 <멋진 징조들>은 원작의 한계도 함께 가져간 작품이기도 하다. <멋진 징조들>은 여성혐오가 너무 짙은 텍스트다. 특히 원작 소설은 숨쉬듯이 여혐을 한다. 섀드웰-마담 트레이시나 아나테마-뉴튼의 관계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 신과 바알세붑을 여자로 설정하거나 페퍼가 유색인종인 등 2019년에 제작하는 드라마로써 최소한의 할 도리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혐오적인 텍스트 속에서 페퍼 혼자 앞서나간 페미니즘 발언하고 있으면 좀 우스워진다.

서로의 세상을 향해 건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멋진 징조들>은 원작 팬들의 구미에 딱 맞는 드라마다. 원작을 좋아하지 않거나 읽지 않고 드라마만 본다고 해도 재미 있을 거라 장담하기는 힘든데, 책의 독자로서는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을 중심부에 두고, 근사한(nice and accurate) AU를 보는 느낌이다. 마이클 쉰과 데이빗 테넌트의 책을 찢고 나온 비주얼도 한 몫 크게 했다. 사실 크롤리는 원작에 비해 달라진(불도저) 느낌이 없잖아 있고(작가가 10년 지나고 보니 캐해석이 달라진 건지 뭔지) 비주얼도 다르게 상상한 사람이 많을 듯 한데, 아지라파엘은 입을 여는 순간 책의 묘사 - 아지라파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 인상을 받았다. 그가 영국인이라는 인상, 그가 지적이라는 인상, 그리고 그가 아산화질소를 마신 원숭이 한 떼보다 더 게이스럽다는 인상. - 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손이 통통한데, 개인적으로 이건 매우 중요하다.

공식인증 존잘미남으로 나올 때조차 저 손을 보셈

 악마와 천사가 불경하게 연애하고 종교도 좀 비트는 <멋진 징조들>, 다들 보세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가입만 하면 7일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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