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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제목: 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 Parts 1 & 2

○공연일시: 2019년 1월 16일 ~ (오픈 런)

○공연장소: Princess Theatre(멜버른)

※스포일러 있음

멜버른 프린세스 극장의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극장 데코

<해리 포터> 시리즈는 단연 영국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컨텐츠다. <해리 포터> 영화도 영국에서 촬영했으며 연극 또한 런던에서 먼저 막을 올렸다. 관객들 또한 해리 포터를 떠올리면 t 발음이 강하게 나는 그 영국 특유의 악센트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리 포터>를 (뮤지컬이나 라이브 쇼가 아닌)연극으로 올리겠다는 발상 자체도 영국이 자신있게 선보이는 두 컨텐츠 장르 - 해리 포터와 연극 - 의 결합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공적인 결합이다!

볼드모트와의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19년 후를 그리고 있는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중년이 된 해리 포터와 '살아남의 아이'의 아들이라는 중압감에 짓눌린 아들 알버스 포터, 그리고 드레이코 말포이의 아들이자 '볼드모트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휩싸인 스콜피우스 말포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재미있는 점은 알버스가 슬리데린 소속이며, 아버지와 달리 퀴디치에도 엉망이고 학교에서 인기 없는 루저란 점이다. 겁 많고 비겁하지만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다 특유의 오만함으로 '잘 나가는' 학생이었던 드레이코 말포이와 달리, 제대로 섞여들지 못하는 너드에 항상 풀죽어 있는 스콜피우스 말포이의 설정도 흥미진진하다. 영웅 해리 포터의 아들이 루저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소설 7권 마지막 시점에서의 알버스도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웨스트엔드 오리지널 캐스트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의 초반부는 마치 게임의 프롤로그처럼 알버스가 어떤 중압감을 가지고 호그와트에 입학했는지, 사람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쳐 얼마나 빠르게 루저로 추락했는지를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호그와트가 천국이었던 해리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고, 알버스는 알버스대로 해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전락하면서 해리와 알버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만큼 악화된다. 스콜피우스는 드레이코와 아스토리아가 아이를 갖지 못해, 타임 터너를 사용해 과거로 되돌아가 볼드모트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라는 루머에 시달린다. 게다가 아버지가 그 드레이코 말포이다. 루시우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들을 대했으리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호그와트에 입학하기 위해 탄 급행열차에서 알버스와 스콜피우스는 친구가 되고, 둘은 지옥 같은 학교생활을 함께 견딘다. 아버지의 가장 중대한 과오 - 케드릭 디고리의 죽음 - 를 알게 된 알버스는 이를 되돌리기 위해 스콜피우스, 케드릭의 사촌 델피 디고리와 함께 타임 터너를 사용하나, 멋대로 과거를 바꾼 탓에 처참한 미래가 반복된다.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바뀌는, 여러모로 게임 같은 진행이다(한편으론 영화 <나비효과>가 생각났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여러모로 실험적인 컨텐츠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파트 1과 파트 2로 나누어진 연극이며, 좌석을 예매하면 같은 좌석으로 파트 1과 2가 동시 예매되는 특이한 시스템을 도입했다(개별적으로 예매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떤 원리인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대중성이 짙은 뮤지컬도 아닌 연극의 팬층은 영화의 팬층보다 훨씬 협소한 데다, 평소에 연극을 즐겨 보는 사람도 주저하게 될 장장 5시간의 러닝타임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큰 모험이었을 테다. 인기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공연을 떠올리면 폭삭 망했던 뮤지컬 <반지의 제왕>이 떠오르는데,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의 가장 큰 강점은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극화하거나 스핀오프 형식으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닌(예를 들어 <드래곤 길들이기 Live on Stage> 같은) 원작의 시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한 권을 영화로 만드는 데에도 지나치게 압축하거나 생략하여 팬들의 비판을 받은 지점들이 있었는데, 더군다나 7권의 소설을 한 편의 공연으로 만드는 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으며, 스핀오프 형식으로 '해리와 친구들의 모험' 식의 공연 컨텐츠를 냈다면 원작 시리즈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이만큼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19년 후라는 설정을 통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달라진 캐릭터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론(오른쪽)과 말다툼을 하는 드레이코(왼쪽)와, 그들을 지켜보는 해리와 헤르미온느(상단)

컨텐츠의 힘이 실로 대단한 것이, 객석의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가 사랑해 마지 않던 <해리 포터>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팬들을 울컥하게 하는 강렬한 뭔가가 있다. 해리 포터는 장장 10년을 우리와 함께 성장해 온 캐릭터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해리 포터' 하면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해리 포터를 먼저 떠올리는 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알버스 포터는 겨우 5시간 - 연극 치고 굉장히 길지만 - 동안 만나보는 캐릭터이고, <해리 포터> 시리즈의 해리만큼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고정 배우를 쓰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프로덕션에 따라 배우가 모두 다르고, 장기 공연의 경우 배우는 계속 교체된다. 하지만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19년 후의 중년의 해리 포터로 설정함으로써 우리가 알던 해리와 외양적으로 다른 해리를 문제 없이 내세울 수 있었고, 알버스와 스콜피우스의 모험과 더불어 양육을 힘겨워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사랑하는)해리의 수난과 성장을 그림으로써 위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더군다나, 항상 굳건하고 용감하게 고난을 헤쳐나갔던 해리가 미숙한 양육자로서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상처주고, 심한 말을 하는 등 실수연발인 모습을 보는 것은 고약하지만 매우 즐거운 일이다. 특히나 '살아남은 아이'로서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타인의 희생을 딛고 생존한 소년 해리가 어른이 되어 과거 죽음의 책임에 대해 문책 당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타임 터너의 이점을 사용해 극중 사망한 캐릭터들과 마주하게 하여 또 한 번 팬들을 여럿 울리는데, 한 마디로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팬들의 한풀이를 해주는 작품이다. 만약 해리가 부모님과 만날 수 있었더라면, 해리가 덤블도어를 솔직하게 탓할 수 있었더라면, 해리가 아들의 이름을 자신을 따서 지은 것을 스네이프가 알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대놓고 팬들 한풀이 해주는 시퀄을 <나루토>의 예토전생 류라 부르며 싫어했었는데, 이 작품은 너무 좋은 걸 보니 내가 <해리 포터>의 팬이어서인가 보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 작품이 재미있는 작품일지에 대해서는, 내가 팬이라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오리지널 웨스트엔드 캐스트의 해리는 나이 든 다니엘 래드클리프보다 훨씬 더 나이 든 해리 같이 생겼다.

물론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네임 밸류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연극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연극성 또한 돋보인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의 여러 리뷰에서 찬사를 받은 것은 '어떻게 한 거야?!'하고 내적 비명을 지르게 하는 여러 특수효과들이지만, 의외로 무대 전체를 뒤집어엎는 대규모의 전환이나 장치는 쓰지 않는다. 영상을 통해 엘사가 마법으로 얼음성을 짓고, 두 사람을 태운 양탄자가 와이어에 매달려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데까지 무대 기술이 발전했는데도 말이다. 포트키를 통해 벽 속으로 사라지고 망토 속에서 다른 사람이 나오는 등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마법을 선보이지만, 내레이터 같이 사람으로 등장하는 마법의 분류모자나 퍼펫으로 등장하는 패트로누스 등,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든 도심 속의 스파이더맨을 무대 위에 구현하려 스턴트를 8명이나 세웠던(그리고 폭삭 망했던) <스파이더맨>과 달리,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연극적 상상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기차 칸칸마다 앉아있던 학생들이 캐리어를 한데 모으면 호그와트 급행열차가 되고, 마법사가 망토를 휘두르면 장면 전환이 된 것을 뜻한다. 마법 수업이나 죽음을 먹는 자들의 지배는 (공연 장르의 도드라지는 특성인)군무로 대체된다. 이 모두가 관객들이 연출이 의도한 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고 연극적으로 너무나 아름답다. <영웅>처럼 열차를 무대 위에 올려 아예 그 위에 물리적으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해리 포터>의 네임 밸류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렇다고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가 <해리 포터> 브랜드 없이도 흥행했을 거라는 점은 절대로 아니다. 정통 판타지 장르 공연은 망한 사례가 수두룩하며, <해리 포터>가 아니었어도 이 작품이 승승장구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특출난가? 흡입력 있고 짜임새 있는 시놉시스인가? 무대장치만으로 볼 만한 가치가 있을만큼 최첨단인가? 모두 아니다. 다만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는 <해리 포터> 원작 시리즈의 아성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이었을텐데,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뽑아낸 독자적으로도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점이 천재적이어서 머리가 띵할 정도다.

마법을 표현하는 군무가 인상적

헤르미온느 캐릭터를 흑인 배우로 캐스팅해서 한 때 가벼운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이 일었다. <해리 포터>가 기독교적 영웅서사를 기반으로 한 백인 중심의 컨텐츠로 비판 받은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전형적인 백인 중심 컨텐츠에서 시대에 맞춰 비백인 캐스팅을 할 때 주인공이 아니라 꼭 메인급 조연을 비백인으로 캐스팅하는 걸 생각하면 좀 열 받는다. 그리고 레이스 블라인드 캐스팅을 하려면 캐릭터별로 돌아가면서 하라. 다른 모든 캐릭터들은 외양적으로 영화와 매우 유사하게 캐스팅해놓고(해리 역 배우는 정말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해리가 자라면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영화 8편에서 연기한 미래의 해리보다도 더 신빙성 있다. 이 외에도 진저의 릴리, 백금발의 드레이코며 모두 영화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헤르미온느가 백인이라는 말은 한 적 없다 라고 롤링이 입 털면 당연히 화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극중 헤르미온느는 성격조차 우리가 아는 헤르미온느의 그것과 판이해서, 영화와 똑같이 생긴 캐릭터들 사이에 헤르미온느 혼자 오리지널 캐릭터마냥 낯설다. 헤르미온느를 흑인 배우로 캐스팅한 것은 당연히 찬성이다. 하지만 다른 프로덕션에서는 나아가 다른 캐릭터들도 변화를 주면 좋겠다. 그리고 론은 극에서 비중이 크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성격이 좀... 좀 이상해졌다. 애초에 원작 분량이 별로 없었어서인지 지니가 그저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된 것도 아쉽다.

<해리 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관람은 과장 좀 보태서 life-changing한 이벤트였다. 아무래도 5시간짜리 연극이라 진입장벽이 좀 높지만, <해리 포터>의 이름 하에 무조건적으로 관람할 여러 사람들을 새로이 공연 장르에 눈 뜨게 할 것이라 기대될 정도로 매력적이다. 역시 세상은 넓고 볼 공연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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