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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2018년 본 공연

BIBC/빕 2018. 5. 27. 22:47

1. NT Live <헤다 가블러>

여성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남성 연출가들은 여성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작품에 손 대는 짓을 그만 둬야 한다. <강박관념>과 <파운틴헤드>까지, 이보 반 호프가 연출한 작품들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타자화되어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남아있다. '현대적 재해석'이란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바꾸기만 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서도 여전히 남성과 남성이 이끌어가는 사회에 여성이 억압당하는 구조가 유효한데, 헨릭 입센의 저작 동기이자 주요 메시지인 구조를 연출가는 왜 <헤다 가블러>에서 벗겨냈는가? 서사가 없다시피 1막 내내 스토리라인 진행을 희생시키며 이 모든 고독과 고통은 마치 헤다 가블러라는 인물의 개인적 특수성이 불러온 자기 파멸적인 결과인 듯한 자세를 취했으면서, 2막의 헤다가 무너지는 가장 큰 요인은 남성인 브라크이다. <헤다 가블러>는 '저 썅년이 잘못해서 결국엔 남성이 손봐준다' 식의 시선을 취하며, 철저히 남성이 바라보는 판타지이고 포르노다. 유독 공을 들인 듯한 브라크가 헤다를 학대하는 장면은 필요 이상으로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여성인 헤다의 고통보다는 헤다를 학대하는 브라크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현재에도 유효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라는 메시지를 들어낸(라고 연출가는 말하지만 너무나 '남성이 벌주는 여성'으로 끝나는) <헤다 가블러>를 굳이 지금 시점에 무대에 올려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시류를 못 읽어도 한을 못 읽었다. <헤다 가블러>를 보고 확신이 든 건 이보 반 호프는 여자한테 관심이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blue(우울하다)'라고 말하며 헤다가 우울할 때마다 뻔한 시점에 흘러나오는 똑 같은 노래는, 연출가가 헤다의 고통과 우울을 딱 그 정도, 1차원적으로밖에 설정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2. NT Live <강박관념>

처음 보는 두 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여자의 남편을 살해하는데, 여자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는 포스터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크레딧조차 올라 있지 않다. 이런 스토리에서 어떻게 남성 주인공만 흥미로운 존재이며 더 깊이 이해해야 할 인물이 되는 것인지? 방랑자 지노는 해나의 구원자이자 파멸자가 되지만, 해나는 사랑에 눈 먼 겁쟁이에서 세속적인 악녀로, 지노를 속이고 지노의 앞길을 막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지노의 방황과 지노의 깨달음을 위해서이며, 똑 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해나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고뇌가 없고 침착하다. <라라랜드>식 편파적인 시선은 그렇다 쳐도, 이유는 덮어둔 채 인간의 욕망이 맞부딪쳐 파멸하는 그 순간만을 그리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연출가가 보고 싶은 장면만 잔뜩 늘어놓은 형국이다. 그리고 주드 로의 불륜 연기 무슨 메소드 연기도 아니고 보기 괴롭다.

3. 서크 엘루아즈 <서커폴리스>

'극장형 서커스', '컨템포러리 서커스의 정수'라는 평을 듣는 서크 엘루아즈의 <서커폴리스>는 마치 현대무용을 보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360도 원형무대의 천막이 아닌 프로시니엄 아치 무대를 활용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듯이 몰입감 있는 영상을 사용해서, 마치 라라랜드를 3D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 또한 좀더 전통적인 서커스의 전형을 유지하던 태양의 서커스와 달리, 서커스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현대적이고 세련됐다. 감성적이고 아름다우며 유쾌함.

4. 브로드웨이 42번가
보세요, 춤추는 다리! 신사들이 사랑과 돈을 노래하고 코러스걸들이 동전 위에서 똑 같은 미소를 띄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뮤지컬 42번가는 지금에 와서는 뮤지컬의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살아있는 사람의 다리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버스비 버클리 스타일의 안무가 너무나 기괴하여 박물관에만 있어도 좋을 법한) 내용과 스타일의 뮤지컬이지만, 어리숙하고 매사 쩔쩔매던 페기 소여가 고개를 쳐들고 관객들을 내려다보며 능란하게 춤추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느껴지는 즐거움 같은 게 여전히 있다. 골든에이지의 브로드웨이도, 대공황의 브로드웨이도 경험해본 일이 없는데 황금빛 시퀸이 번쩍이는 의상의 코러스걸들과 '42번가에 마음을 주되 전부 주지는 말라'는 줄리안 마쉬의 말을 들으면 왠지 그리운 향수에 젖어 변해버린 브로드웨이에 대한 쌉쌀함까지 느껴지니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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