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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공연일시: 2018년 9월 5일 ~ 2018년 10월 28일

공연장: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

스포일러 있음.

서커스가 벌어지는 마을

극악무도한 납치단 콤프라치코스에게 유괴되어 얼굴을 기괴하게 성형 당해 웃는 것 마냥 입 양쪽이 찢어진 소년 그윈플렌은, 동료가 잡힌 후 도주하던 콤프라치코스에게 버림 받는다. 홀로 눈밭을 헤매다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던 눈 먼 아기를 발견하고, 아이를 구조해 '데아'라 이름 짓는다. 이 둘을 약장수 우르수스가 거두어, 셋은 프릭쇼에서 '웃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공연하며 근근하게 생활을 이어간다.

이상이 뮤지컬 '웃는남자'의 줄거리 개요이다. 누가 들어도 단번에 끔찍하고 가슴 아픈 소재('콤프라치코스'라는 이름은 허구지만 실제로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다 성장을 제한하거나 관절을 탈구시키는 등 신체를 변형하여 귀족들에게 팔았던 이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지만, '웃는남자'는 굉장히 도식적으로 전개된다. '지금쯤 사회를 고발하는 노래가 나와야 하니' 우르수스가 세상을 욕하고, '지금쯤 사랑 노래가 하나 나와야 하니' 그윈플렌과 데아가 듀엣을 부르는 식이다. 서사가 방대해서였을까? 확장할 곳과 과감히 쳐낼 곳을 찾지 못한 듯, 1,000쪽에 달하는 빅토르 위고의 원작소설의 내용이 가까스로 160분 안에 구겨넣어져 인물들은 이렇다 할 계기도 없이 넘버 한 곡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마음을 바꾼다(빨래터 신과 그윈플렌 부모님이 부르는 넘버는 정말이지 쳐내도 될 듯 하다). 더군다나 빅토르 위고의 아름다운 문장과 기나긴 배경설명 없이 2막으로 압축된 '웃는남자'는 고춧가루를 뿌린 듯한 한국 아침드라마의 냄새가 난다('가난하고 흉측해 멸시 받던 내가 사실은 이 나라 제일 가는 귀족이라니?'). 이렇다 보니 '웃는남자'의 인물들은 평면적인 데다, 설득력 있는 서사를 얻지 못하고 저마다의 엔딩을 향해 냅다 달린다.

작품을 관람한 모든 이가 만장일치로 찬사를 던졌던 세트 디자인은 단연 굉장한 볼거리다. 프로시니엄을 덮어 양피지를 보는 듯한 느낌의 프레임이나 터널을 연상시키는 무대, 특수 천을 활용한 바다 등 제작비를 아끼지 않은 무대는 감탄의 연속이다. 다만 '웃는남자'는 전개가 굉장히 빠르고 매 넘버마다 장면이 전환되기 때문에, 콤프라치코스가 항해하는 바다 신, 밑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위압감을 주는 의회 신 등에서 무대가 인상 깊었던 만큼 그 외 조시아나의 침대, 가든 파티, 그윈플렌의 방 등은 5분 뒤면 전환될 텐데 너무 화려하고, 연극적 상상력이 없는 실제 침실과 파티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라 아쉬웠다.

만인의 찬사를 받은, 특수 천을 사용해 바다를 표현한 마지막 장면
인상 깊었던 재판장 장면. 그윈플렌의 입을 닮은 재판장에 재판관들이 밑을 내려다보는 듯해 위압감을 준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데, 하고 많은 작품 중에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19세기 근대 문학소설이 그 소재로 선택된 점도 의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빈부격차는 항상 있어왔고, 상위 1%의 강자는 항상 약자를 착취해왔다. '웃는남자'를 관통하는-또는 관통한다고 주장하는- 메시지는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만들어진 부자들의 낙원'이다. 하지만 극중 표현되는 강자들의 횡포가 애매모호하고, 과장되게 풍자된 귀족들은 사람들이 너무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양식화된 모습이라서 '웃는남자'가 대체 현 시점에 무슨 시의성을 갖는지 의문이 든다. 귀족이 되어 단꿈에 젖어있다가 회의에 참석해 몇 마디 듣고는(귀족들의 횡포를 모르던 것도 아니었을텐데) 갑작스레 일어나 눈을 뜨라고 노래하는 그윈플렌의 연설은 너무 판에 박혀서, 아무 의미도 없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그윈플렌을 유혹하는 조시아나
같은 텍스트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2012년 프랑스 영화 L'homme Qui Rit

뮤지컬 '웃는남자'는 비주얼적으로 영화 '웃는남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위 영화가 들은 전반적인 평은 이랬다: 아름답고 화려하나, 내용이 없다. 영화 '웃는남자'의 그윈플렌을 보면 오목조목 예쁜 미청년이고, 조시아나의 침대에서 옷을 벗은 그윈플렌의 맨몸이 조각 같이 아름다워서 입가의 상처 따위가 뭐 어떠냐 싶은 감상이 든다. 뮤지컬 '웃는남자' 또한, 부패하디 부패한 귀족들의 횡포와 빈곤층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의도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은 채 자극적인 소재와 특수분장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남자주인공, 화려한 무대만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제작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훗날 스타 캐스트가 아니라 대중이 잘 모르는 배우가 주연하다면, 지금만큼 화제성 있는 작품일지도 의문이다.

*데아는 그윈플렌의 연인이라기보다 그윈플렌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심볼에 가까운, 정말 그윈플렌을 위한(그리고 그윈플렌의 서사 완성을 위해 죽는) 캐릭터일 뿐이라 캐릭터 소개를 읽자마자 너무 싫어서 환장을 했는데, 막상 무대 위 데아를 보니까 너무 귀엽고 천진난만해서 엄마미소 짓고 봤다. 평소에 정말 싫어하는 소모적인 캐릭터인데 이럴 수 있다니 놀라웠다...

**조시아나가 그윈플렌을 유혹하는 (무수히 많은)장면이나 데이빗이 데아를 겁탈하려고 하는 장면, 너무 과하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남자가 기괴한 모습의 주인공이 타락하고 음란한 귀족사회에 편입되는 이야기다 보니 데카당트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 살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뮤지컬 '웃는남자'는 하나도 안 퇴폐적일 뿐더러 일단 와일드혼의 음악이 매우 건강하다. 뭔가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단순 눈요깃거리를 위해서라면 제발 절제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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