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A Hundred Words for Snow)
- 공연기간: 2022.03.15 ~ 2022.05.01
- 공연장: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4관
- 출연: 유주혜, 송상은 (로리 역)
- 원작: 태티 헤네시 (Tatty Hennessy)
- 번역, 연출: 김세은
- 무대, 소품, 의상: 최영은 / 조명: 김재덕 / 음악: 김희은
- 기획, 제작: (주)엠피앤컴퍼니 / 주관: 달컴퍼니
지리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로리는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아버지가 자신과의 북극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북극에 깃발을 꽂은 수염 난 탐험가들을 동경했던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로리는 아버지의 유골함과 어머니의 신용카드를 손에 들고 북극행 비행기에 오른다.
*스포일러 있음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하 '눈단어')>은 인류의 오랜 미지의 탐험지이자 기후위기의 최전선인 북극을 배경으로 죽음과 재탄생을 그려낸 태티 헤네시의 신작이다. 2018년 볼트 페스티벌에서 수상하고 2019년 런던 오프브로드웨이 트라팔가 스튜디오에서 공연되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계기로 미뤄왔던 여행에 나서는 주인공의 얘기는 어딘지 많이 들어본 듯 하다. 그럼에도 로리의 솔직한 여정은 90분간 관객들을 코가 떨어질 듯한 노르웨이의 설산으로 인도한다.
북극 여행은 더 이상 와일드하지도, 로맨틱하지도 않다. 깃발도, 폴대도, 눈보라에 갇히면 굴을 파고 연명할 훈제육도 필요 없고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로 날아가 스발바르 제도의 롱위에아르뷔엔까지 3시간 더 비행하면 된다. 로리 또한 21세기 현대인답게 비행기를 타고 스발바르 제도에 도착한다. 무수히 많은 탐험가들이 목숨을 잃었던 여정은 이제 노르웨이의 여느 관광안내소 안내책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현대인이자 북극광 지리선생님의 딸인 로리는, 또한 탐험가들이 이누이트들을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에스키모라고 낮추어 불렀고 이누이트 여성의 성구매자이기도 했으며, 이누이트들에게 최초로 매독을 옮겼다는 사실도 안다. 탐험가들이 찾아 헤맨 북극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는 얼음 뿐이란 사실이 밝혀졌고, 더 후대에는 얼음 속에 미생물과 작은 물고기들이 사는 무한한 생명의 땅임이 알려졌다. 현재 북극은 녹아 없어지는 중이다.
로리는 여전히 탐험가들의 명언에서 힘을 얻지만 그들의 구시대적 이면도 알고 있는 현대인의 관점을 가지고 북극으로 여행한다. 북극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북극곰과 눈보라 대신 로리를 맞이하는 것은 타지의 사람들이다. 모델 같이 잘 생겼지만 자신보다도 북극에 대한 지식이 없는 오슬로의 남자애.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을 뿐이지만 기꺼이 어른의 친절을 베풀어줬던 프리다.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로리의 여행이 좌절될 뻔한 순간, 로리의 어머니가 로리를 쫓아 얼어붙은 땅에 도착한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가 동경하던 남자 탐험가들의 발자취를 좇아 시작한 여정이었지만, 머나먼 땅에서 로리는 자신과 닮은 꼴이었을 다른 여성들을 생각하고,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고 또 거절하고, 마지막에는 엄마와 화해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 걸맞게 로리의 엄마는 집에서 발만 동동 구르지 않고, 딸의 소재를 알자마자 비행기표를 결제해 스발바르 제도로 날아온다. 거짓말 같이 최고의 결말로 해소되는 이 이야기가 나는 기쁘기만 하다.
잔뜩 낭만적으로 묘사된 바와 달리, 이누이트 언어에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없다고 한다. 로리는 가장 안전하고 현대적인 방법(헬리콥터 투어!)으로 북극에 발자국(상공을 날았으니 발자국은 없겠지만 적어도 로리의 아이폰 GPS에는 기록이 남아있겠지)을 남긴 후에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로리가 남은 생애 동안 다녀볼 수많은 여행 중에 북극이 가장 인상적인 여행으로 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낭만을 걷어내도, 로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이 여행에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웠다.
아래는 트라팔가 스튜디오에서 공연되었던 <눈단어> 공연 사진들. 유골함이 좀 더 보란 듯한 디자인이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넷플릭스 샌드맨 후기: 어쨌거나 샌드맨은 한 번은 영상화되었을 테니까 (0) | 2022.08.08 |
---|---|
연극 오아시스 후기: 결국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하자, 일 뿐인데 (0) | 2022.06.12 |
국립창극단 리어 후기: 늙은 아비의 간장이 끊어지누나 (0) | 2022.03.27 |
2021년 본 공연 (0) | 2022.02.26 |
2022년 본 공연 (0) | 2022.01.16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