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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라이브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National Theatre Live: Cyrano de Bergerac)

출연: 제임스 맥어보이 (James Mcavoy), 아니타-조이 우와예 (Anita-Joy Uwajeh), 에벤 퍼귀레도(Eben Figueiredo) 외
원작: 에드몽 로스탕 (Edmond Rostand)
각색: 마틴 크림프 (Martin Crimp)
연출: 제이미 로이드 (Jamie Lloyd)
디자인: 수트라 길모어 (Soutra Gilmour)
조명: 존 클라크 (Jon Clark)
음향/음악: 벤 린햄 & 맥스 린햄 (Ben Rinham & Max Rinham)

 1640년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글은 운문이었고, 현대에서 가장 운율을 잘 살리고 그에 집착하는 장르는 랩이다. 그래서 제이미 로이드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는 랩을 한다.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야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수 없이 많이 각색되었지만, 장난감 같은 코 분장과 치렁치렁한 복식을 벗어던진 시라노는 무채색의 세계에서 마이크를 검처럼 쥐고 폭력적인 운율과 시어로 사람을 베는 구어(Spoken Word)의 신이다.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를 책이든, 영화든 한 번도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데, 국내에서 공연된 뮤지컬 <시라노> 덕에 외모에 자신 없는 시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사모하는 남자를 대신하여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다는 내용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만 들었을 때에는 나름대로 귀여운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마 제이미 로이드 연출에서 그렇게 표현되었을)마초에, 집착적이고 광적인 시라노의 '록산의 사랑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그의 행복과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 자신의 글이라면 의미가 있다'는, 순애보의 시옷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발상으로 모든 게 시작이 되었다... 애초에 크리스티안은 시라노의 '말'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라노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사랑의 기촉제이자 속임수의 무기인 언어로 예정된 파국을 자아낸다.

  화려한 의상도, 무대도 없지만 몇 대의 의자와 스탠드 마이크에 의지해 소품의 활용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액팅은 최대한 자제한 채 대사만으로 3시간에 달하는 극을 이끌어간다. MC와 비트박서가 있는 랩 배틀(어떻게 보면 연극판 <해밀턴> 같다)은 이제 연극에서도 자주 보이는 형식이지만 촘촘히 짜여진 대본과 배우의 역량으로 빛을 발한다. 시라노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주도하기 때문에 당연히 시라노 역이 돋보일 수밖에 없지만, 제임스 맥어보이는 다른 조연이나 앙상블들과 확연히 다른 생경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온통 회색빛인 무대에서 시라노 혼자 살아있는 듯 보이거나, 혹은 시라노 혼자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거친 스코티쉬 악센트로 리듬을 갖고 노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에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다. 크리스티안인 척 록산에게 구애하며 진부한 말이지만 록산을 원한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그 긴 대사를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읊는 제임스 맥어보이가 클로즈업으로 잡히는데, 실제로 관람하는 것도 당연히 좋겠지만 집중할 부분을 잡아주는 영상 매체로 볼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다.

  전쟁에서 크리스티안이 죽은 후 15년 동안 록산을 돌봐 온 시라노는, 크리스티안의 마지막 편지를 아직도 갖고 있다는 록산의 말에 편지 속 사랑의 밀어가 모두 자신의 말이었음을 고백한다. 전후 1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운문의 시대는 가고 산문이 부상한 것처럼, 모든 할 말을 전한 시라노도 죽어 없어진다.
텅 빈 무대에 경량패딩을 입고서도 좌중을 장악하는 배우의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연극이었고, 제임스 맥어보이는 압도적이었다. 훌륭한 시 앞에 불 같이 타오르는 록산 역의 아니타-조이 우와예와 배우지 못한 자격지심에 흔들리는 젊은 군인 에벤 퍼귀레도도 정말 좋았다. 말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는 듯, 사람들이 들어찬 극장도 쏟아지는 포화도 큰 액팅 없이 대사(90% 정도!)와 이따끔 암전, 음악만으로 표현해낸 것이 특히 인상 깊다.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는 무대 세팅 때문에 1,000석도 안 되는 Playhouse Theatre에서 공연했는데, 관객들이 밀집도 높은 극장에서 다닥다닥 붙어앉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배우들이 연기하는 작품을 보고 있자니 겨우 작년 일인데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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