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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일리아드>

  • 공연기간: 2021년 6월 29일 ~ 2021년 9월 5일
  • 공연장: 예스24스테이지 2관
  • 출연: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 (내레이터 역) / 기타 김마스타, 퍼커션 장재효, 하프 이기화 (뮤즈 역)
  • 극작: 리사 페터슨 (Lisa Peterson), 데니스 오헤어(Denis O'Hare)
  • 연출: 김달중 / 번역: 함유선 / 작곡&음악감독: 홍정의 / 무대디자인: 김종석, 신나래 / 조명디자인: 김지형 / 음향디자인: 한문규 / 의상디자인: 도연 / 분장디자인: 배시하 / 무대감독: 정휘경 
  • 기획&제작: 더웨이브 / 라이선스: 인피니스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달아난 파리스를 쫓아, 아가멤논은 영웅 아킬레우스와 오딧세우스를 비롯해 수십 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트로이를 침략한다. 트로이에는 용맹한 헥토르가 버티고 있다. 소득 없는 전쟁이 이어진 지 어느덧 9년째, 나레이터는 오랫동안 바뀌지 않은 노래를 한 번 더 들려주는데... 


<일리아드>는 호메로스의 동명의 서사시를 각색한 1인극이다. 고대부터 수많은 전쟁을 목격하고 노래로 이를 전해왔던 내레이터는 한 번 더 위대한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다. 불세출의 영웅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희망 헥토르. 탐욕스러운 아가멤논.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영웅들의 이름은 여러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지만, 트로이의 해안에는 9년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무명의 병사들도 있었다. 트로이 전쟁은 그 후에 이어진 콘스탄티노플 함락,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최근 탈레반의 카불 함락과 다르지 않고, 죽어간 병사들은 우리 주위의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그래서 원제가 'The Iliad'가 아니라 'An Iliad'이다).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똑 같은 전쟁을 반복해 온 꼬라지를 보고서도 내레이터는 계속 노래를 전한다. 이 노래가 후대에 알려져 교훈을 주기를. 이번 만큼은 다른 결말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좋은 얘기는 거기까지였고요... 작품의 메시지가 소재와 각색과 맞아 떨어진다는 건 알았으니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사실 나는 담담하고 초연한 내레이터를 기대했었다. 내레이터는 고대부터 볼장 다 보고 현대까지 존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건조하고 덤덤한 1인극을 기대했기 때문에 너무나 판이한 분위기에 더 적응 못 한 걸지도 모른다. <일리아드>는 건조함과는 정반대의, 드라마가 (과하게)넘치는 작품이었다. 신화 속 전쟁 이야기가 그렇듯이 일리아드는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기고 아가멤논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죽음을 맞이하는 파트로클로스, 친구의 원수 헥토르를 죽여 전차에 매다는 아킬레우스... 이 모든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내레이터가 모조리 도취되어 강조해 버린다. 내레이터가 너무 몰입해 버린 탓에 보는 오히려 보고 있는 나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발을 구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한 두 번이야 놀라지 중반부턴 피로할 뿐이었다. 무당이 신내림을 받듯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듯한 연기(그리고 당연히 직후에는 음악 꺼지고 조용해지면서 이성 되찾아야 함)를 하는데 단단히 꾸며진, 연기한다는 느낌이 너무 나는 연기였다... 슬픔과 고통은 반드시 울음과 고함과 괴성을 동반해야 하는가? 일리아드는 죽음의 연속인데 매 순간 비슷한 스타일로 고함치며 슬퍼하니 피로도가 엄청났다.

신전처럼 꾸며진 세트는 죽은 병사들의 투구가 지탱하고 있다

또 하나 괴로웠던 점은 극의 시작부터 내레이터가 분명히 관객들을 인지하고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준다는 설정인데, 제4의 벽을 깨고 관객들에게 직접 말하는 대사가 많았음에도 전혀 관객을 인지하고 노래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하면서 계속 추임새를 넣긴 넣는데 관객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가 정말 이야기를 듣고 있다기엔 너무 드라마틱하고... 인물에 따라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대사를 칠 줄은 몰랐는데 너무 연극적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테이블에는 앱솔루트 보드카 병이 보이고 내레이터가 지금 현대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고대 무당 같이 보이는 의상 또한 더 거리감을 줬다. 

소재와 설정만 봐서는 실패할 수가 없는 소재 같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너무나 사랑함에도 1시간 50분(1인극들 자꾸 러닝타임 넘어가시는데 지켜주세요 제발) 동안 극장 안에 감금된 기분이었다. 현대와 어떻게 닿아있는가 보다는 일리아드를 극적으로 스토리텔링해주는 데에 더 주안점이 맞춰진 것 같았고(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배우님의 연기노선과도 심하게 내외했다. 극의 메시지와 슬프게도 딱 맞아 떨어져서 <일리아드> 희곡이 쓰여질 당시에는 없었던 탈레반의 카불 침공이 극에 추가되었지만, 이 극이 정말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P.S. 외국어 고유명사가 참... 항상 고민되는 지점이긴 하다. 대사 자체를 노래하듯이 고저가 있게 치는데 사람 이름과 지명을 장음을 많이 사용하여 영어식 액센트처럼 발음한다. 그런데 이게 알아듣기는 더 힘들고 그렇다고 원어에 가까운 발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건 진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과하게 굴리는 발음을 들으면 자꾸 내외하게 돼서 그냥 아킬레우스, 헥토르, 쓰는 그대로 발음하면 좋겠다ㅠㅠㅠ 극 중에 나온 노스다코타, 네브라스카 등의 지명도 고대와 다를 바 없는 현대를 지칭하는 거라서 어딜 말하는 건지 딱딱 꽂혀야 하는데 알아듣기가 더 어려웠다... 

P.S.2 공연을 보기 전 희곡으로 읽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뮤지컬 <하데스타운>과 메시지가 매우 유사하다. 이번만큼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계속되는 비극의 노래를 부르는 것. <일리아드>의 카피는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하데스타운>의 가사는 '이건 슬픈 노래, 어떻게 끝나는지 알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러, 이번엔 다르게 끝날 수도 있을 것처럼'.

P.S.3 창부처럼 묘사한 헬레네 너무 구리다.

P.S.4 제일 위대한 영웅을 누구라고 생각하냐, 남자친구? 아버지? <진짜 너무 구리다. 지금 때라면 김연경 안산 정도는 얘기해 줬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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