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라자러스 (Lazarus)
작곡: 데이빗 보위 (David Bowie)
원작: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The Man Who Fell to Earth)
극작: 엔다 월쉬 (Enda Walsh)
연출: 이보 반 호프 (Ivo Van Hope)
영상 디자인: 탈 야르덴 (Tal Yarden)
무대, 조명 디자인: 얀 퍼스베이벨트 (Jan Versweyveld)
출연: 마이클 C. 홀 (Michael C. Hall), 에이미 레녹스 (Amy Lennox), 소피아 앤 카루소 (Sophia Anne Caruso), 마이클 에스퍼 (Michael Esper), 제이미 무스카토 (Jamie Muscato)
※스포일러를 포함하지만... 아무 상관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누구를 탓하겠나? 내가 예정된 재앙에 스스로 발을 담근 탓이다.
뮤지컬 <라자러스>는 故 데이빗 보위 생전의 마지막 프로젝트, '요즘 가장 핫한'이라는 수식어가 근 10년 간 떠나질 않은 유럽 연극계의 거장 이보 반 호프 연출, <원스>의 엔다 월쉬 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이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2015년 공연된 뉴욕 씨어터 워크샵 프로덕션을 유료 중계한다고 했을 때, 한국은 커녕 온라인 상으로도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이 수수께끼의 작품을 보기로 결정한 건 당연한 수순(<라자러스>는 2021년 1월 8일 ~ 10일 dice에서 유료로 중계했다).
우선 <라자러스>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를 사용한 주크박스 뮤지컬이고, 내용 또한 데이빗 보위 주연의 1976년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시퀄을 다루고 있다.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 뉴턴(마이클 C. 홀 扮)은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떠나간 메리 루를 그리워하며 알코올에 찌들어 산다. 뉴턴의 '조수' 엘리(에이미 레녹스 扮)는 결혼한 몸이지만 뉴턴을 남몰래 사랑하고(왜?), 메리 루를 따라 해 머리를 파란색으로 물들이고 메리 루의 파란 드레스를 꺼내 입는다(왜?). 한편 뉴턴의 앞에 그를 화성으로 보낼 로켓을 만들어주겠다는 소녀(소피아 앤 카루소 扮)가 나타나고(왜?), 뉴턴의 무관심에 슬퍼하는 엘리 앞에 살인마(왜?) 발렌틴(마이클 에스퍼 扮)이 나타난다.
시놉시스만 요약했는데 왜?가 4번이나 나왔다. 사실 이 정도의 내용은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본 내가 죄인이다...
스토리는 매우 간단한데도 <라자러스>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나질 않는다. 마치 나만 빼고 전체적인 스토리라인과 메시지, 배경지식을 공유해 둔 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절정에 달한 감정만 폭발시키는 느낌이다. 뉴턴은 공허에 잠겨 있고 엘리는 권태에, 소녀는 슬픔에, 발렌틴은 분노에 잠겨 있는데 대체 어떻게 따라가야 할 지 모르겠다. 공연 보기 전에 뭔가 작중 배경을 설명해 주는 세미나 같은 거 했나요? 저만 못 들은 건가요?
누누히 말하지만 이보 반 호프는 여자를 모른다! 이해해 보려고도 안 한다. 백발 긴 머리에 거의 맨살처럼 보이는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나오는 소녀(이름도 없다 Girl이다)가 나오는 순간 표상하는 이미지가 너무 명백해서 기분이 나빠졌으며... 엘리는 뉴턴의 전 부인을 질투하며 파란색 슬립온을 입고 파란 머리에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나온다. 소녀와 엘리는 순수한 소녀 - 세속의 닳고 닳은 여자로 대비되며 심지어 작중에서 뉴턴의 양쪽에 앉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보 반 호프한테 여자는 어떠한 이미지나 오브제로만 존재하는데 그 이미지마저 케케묵은 것들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 본 풍경>에 코가 꿰여서 내가 아직까지 희망을 갖고 이보 반 호프 작품을 보며 욕하고 있다(남자 주인공을 위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오브제로서만 존재하는 여자를 보고 싶다면 <파운틴헤드>를,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인데도 포르노로 존재하는 여자를 보고 싶다면 <헤다 가블러>를 보시라. 아니다 보지 마라...).
무엇보다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뮤지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들으며 추억에 젖...기엔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이 너무 기괴하고 안 그래도 희미한 서사에 데이빗 보위의 난해한 음악들이 더해지니 더욱 의문만 커질 뿐이다(그리고 애초에 데이빗 보위의 노래가 데이빗 보위가 부르지 않아도 좋은 노래들이었던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소수의 작품들 중 하나였다. 밀집된 소극장에 인터미션도 없는 <라자러스>를 앉아서 보고 있었다간 미쳐버렸을 것이다. 중간중간 노트북을 닫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티켓값 + 어디서도 이 공연은 다시 못 보겠지(제발) 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좋은 점을 찾자면... 이보 반 호프 사단의 공무원 탈 야르덴과 얀 퍼스베이벨트가 (이번에도)힘을 냈다. 온스테이지 밴드를 유리창으로 구분하고 중간에 LED판을 놓았는데, 여닫을 수 있는 커튼과 유리창까지 무대의 일부로 활용하여 꽉 찬 쓰임을 보여줬다. 애초에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프로덕션 사진에서 보이는 영상 활용 때문이었다. 이보 반 호프 사단의 작품들은 선입견 섞인 컨템퍼러리의 정수(미니멀한 무대 + 서사가 분명치 않은 난해한 내용 + 갑자기 사람 죽이기 +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싫어지는 것까지)를 보여줘서 볼 때마다 '나랑 현대극은 안 맞는가보다'하는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
<라자러스>의 존재 이유는... '세상엔 이런 작품도 있어야' 해서 가 아닐까 싶다... 데이빗 보위와 이보 반 호프가 만났다고 했을 때 이럴 줄 미리 알았는데 꾸역꾸역 본 내가 죄인이다. 스스로 불러 온 재앙이라 어디 가서 욕도 못 한다(블로그에 실컷 하고 남들 만났을 땐 안 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영상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지만, 굳이 궁금한 사람들은 이하 링크에서 OST를 들어볼 수 있다: youtu.be/dJuJcCx5-xE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테나뮤직 사운드 프레임(SOUND FRAME) 전시 후기 (0) | 2021.07.11 |
---|---|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후기: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불완전해졌어 (0) | 2021.06.27 |
2021년 읽은 책 (0) | 2021.01.31 |
[코로나 시대의 공연예술] 우울증을 다룬 1인극 <All of Me: The Twine>이 인터랙티브 연극을 시도하다 (0) | 2021.01.19 |
2021년 본 영화 (0) | 2021.01.08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