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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후기: 도덕이 사망선고를 받을 때

BIBC/빕 2020. 6. 22. 20:37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공연기간: 2020년 6월 16일 ~ 2020년 9월 6일
공연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출연진: 우미화/정재은/양소민(엘레나 역), 강승호/김도빈/박정복(발로쟈 역), 김효성/최호승(비쨔 역), 김주연/이아진(랄랴 역), 김현준/오정택(빠샤 역)
원작: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
연출: 김태형 / 각색: 오인하
제작: (주)아이엠컬쳐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의 생일날 밤, 3학년 학생 넷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꽃다발과 크리스털 잔, 샴페인을 들고 집에 찾아온다. 하지만 학생들의 목표가 망친 수학시험의 답안을 바꿔치기하기 위해 엘레나가 보관하고 있는 금고의 열쇠를 받기 위해서임이 드러나면서, 정직과 도덕을 믿는 엘레나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겠다는 학생들이 충돌하는데...

스포일러 있음

1980년 발표된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세르게예브나'는 힘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러시아의 신세대와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의 가치를 믿었던 기성세대의 충돌을 나타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빠샤와 비쨔, 랄랴는 망친 졸업시험을 만회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발료자는 성실과 진실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엘레나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일종의 실험을 위해 엘레나를 찾아간다. 

깜짝축하와 선물로 환심을 사고 술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다음 엘레나의 투병 중인 모친을 최고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해주겠다는 결정타까지 던진 뒤, 발료자는 도움의 작은 댓가로 시험지를 보관하는 금고의 열쇠를 요구한다. 엘레나는 당연히 거절하나, 아이들은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전화선을 끊고 문 앞에 막아서 엘레나를 가둔다. 학생들은 차분하게, 때로 격앙되어 엘레나를 설득하려 하고, 완고한 엘레나를 힘으로 휘두르고 집을 뒤지기까지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연극이 '12인의 성난 사람들' 같이 앉아서 찐한 도덕적 토론을 하는 건줄 알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극이 끝난 후 상당히 기분을 잡친 채 극장을 나오게 되었다. 개인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도덕과 타협에 대한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게 도덕이고 이는 의논할 필요가 있는 주제이지만 신체의 안전이 위협 받는, 일방적인 폭력 앞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이 부딪혀봤자다.

엘레나와 발로쟈(와 아이들) 둘 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점 또한 극중 등장인물들의 토론에 공감할 수 없고 궤변을 늘어놓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발로쟈는 자신의 권력과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으며(발로쟈에게 범죄자 외의 미래가 있는지), 반면 엘레나는 내가 들어도 학생들과 함께 실소를 터뜨릴만큼 도덕책 같은 이야기만 한다. 현실이 얼마나 부당한 지 얘길 해도 엘레나는 정직과 도덕을 중시하라고만 하고, 엘레나가 상식과 감정에 호소하면 학생들은 비웃기만 하니 작품의 토론 전체가 서로 벽을 보고 말하는 매우 원론적이고 단편적인 집단적 독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현실은 완전한 선이나 악 중에 양자택일하는 게 아닌데, 엘레나와 발로쟈들은 죽은 사람을 살릴 거냐 죽게 놔두고 지갑을 훔칠 거냐 같은 극단적인 상황만을 이야기한다. 상황 자체도 엘레나가 타협할 여지라도 있게 꾸며보던가, 열쇠를 주지 않으면 폭행을 당할 판인데 거기서 도덕성 얘기가 나오는 게 우습다.

엘레나의 집을 뒤지고,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거짓눈물 작전까지 펼쳤지만 열쇠를 얻지 못하자 발로쟈는 열쇠를 주지 않으면 랄랴를 강간하겠다고 한다. 엘레나는 열쇠를 내어주고, 발로쟈는 자신의 승리에 기뻐하고 랄랴를 강간해서 열쇠를 얻자는 제안에 망설였던 빠샤와 비쨔를 쓸모 없는 꼭두각시들이라고 조롱하며 열쇠를 두고 집을 나선다. 빠샤는 여자친구인 랄랴의 강간모의에 동참한 자신을 영원히 후회할 것이고, 발로쟈가 무서워 랄랴의 팔을 붙잡고 있던 비쨔 또한 그럴 것이며, 랄랴는 친구들에게 배신 당했지만 엘레나에게 아무도 열쇠를 가져가지 않았다고 자신의 비참함을 포장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발로쟈가 승리했다고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은 발로쟈가 승리를 얻어낸 수단이 그렇게 자신있어하던 협상이 아니라 협박과 폭력이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폭력은 참으면서도 학생이 강간 당하는 걸 막기 위해 열쇠를 내어줬다면 그거야말로 엘레나가 인본주의를 믿고 실천하며 도덕적으로 숭고함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이 최후의 수단 때문에 결국 발로쟈가 '실험'하려던 건 뭔지 아리송해진다(이럴 거면 그냥 무장침입해서 훔치는 게 낫잖아?). 발로쟈가 일관적인 캐릭터가 되려면 엘레나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열쇠를 얻어내야 했다. 나도 좀 더 이런 지적인 전개를 기대하기도 했다. 발로쟈처럼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를 섞어놓은 듯한 남들 머리 위에 앉아서 모두를 조종하는 알파메일 남학생도 이제 일정 스테레오타입이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가 된 것 같은데, 전혀 새롭지 않고 학교에서 독후감 과제 내주면 꼬오옥 히틀러 나의 투쟁 같은 거 읽고 독후감 써내는 남학생들 생각 나서 괴롭다. 당대 러시아에서 충돌한 구시대와 신시대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극단적으로 설정한 것은 알겠지만, 훨씬 더 다양한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를 사는 관객들에게 발로쟈의 말은 궤변, 엘레나의 말은 이상일 뿐으로 어느 쪽에도 공감하기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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