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후기: 죽은 영혼들과 살아있는 조문객들의 단체 살풀이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 공연기간: 2023.04.15 ~ 2023.04.23
- 공연장: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 출연: 김시연, 나유진, 박세화, 안창현, 임영식, 임진웅, 주선옥, 허윤혜
- 작가: 배혜률
- 음악: 지미 세르
- 연출: 이진엽
- 안무: 권령은
- 조명: 신동선 / 무대: 송성원 / 음향: 전민배
- 공동제작: LG아트센터, 코끼리들이 웃는다, 금천문화재단 / 창작: 코끼리들이 웃는다
이승과 저승 사이 차차차원의 틈, 까마귀들이 길어 올린 네 명의 영혼. 성석, 소리, 나라, 가다는 까마귀들의 도움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해 내지만, 자신이 원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장례식에 절망한다. 까마귀들은 이들을 도와 원하는 대로 장례를 다시 치러주기로 하는데... 네 명의 합동 장례식을 치러 준다고!? 원하는 것이 저마다 다른 네 명은 의견 통일이 영 어려워 보인다.
★★★★☆
스포일러 있음
장르를 단순히 '뮤지컬'이라고 써 뒀지만, 프로그램북에 기재된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이하 <차차차원>)의 정확한 장르는 '이머시브 SF 판타지 휴머니즘 코미디 테크니컬 송쓰루 괄호 열고 아마도 괄호 닫고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다. ()를 괄호 열고 괄호 닫고 라고 풀어 쓴다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다원예술st의 표기법에 겁먹지 말자. 적어도 <차차차원>의 야심찬 장르 표기는 허위 광고가 아니고 그 모든 걸 한 스푼씩 다 넣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로비에 얼굴을 은색으로 칠한 까마귀들이 나와 관객들의 이름을 부른다(공연 전에 노트에 이름을 적고 짐을 맡기는 절차가 있다). 4명(마리)의 까마귀들을 따라 4개 그룹으로 나눠진 관객들은, 각자의 까마귀의 인도에 따라 차차차원의 틈으로 들어가게 된다(장르 중에 일단 판타지는 확인된 셈이다).
이머시브 파트는 여기서 나온다 - 까마귀가 소매를 걷으면, 따라서 이동하거나 춤을 춰야 한다. 관객들은 인도자 까마귀에 따라 성석, 소리, 나라, 가다의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인물 소개:
성석: 장수해서 기네스북까지 오른 퀴어다. 미러볼 불빛 아래 모두가 춤추고 환호하는 장례식을 원했으나, 엄숙 그 자체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소리: 발연기 논란으로 악플에 시달린 액션 배우다. 스턴트 액션 중 사고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까지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아, 평온하고 조용한 장례식을 원한다.
나라: 이 작품의 SF를 맡고 있다(난 그렇게 생각한다). 레즈비언 엄마들 밑에서 자라, 화성 탐사 우주선에 올랐으나 기기 결함으로(테크니컬도 맡고 있나?)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죽는다. 오글거리는 애도고 뭐고 다 싫다.
가다: 리비아 난민캠프에서 국경을 넘기 위해 삼촌과 보트에 올랐지만, 보트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삼촌이 만들어 주겠다던 통조림 콩 파스타를 먹고, 모두 손 잡고 기도하는 장례를 원한다.
원형의 케이크를 4등분하듯 공간이 가림막과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한 번에 한 명의 영혼밖에 볼 수가 없다. 성석, 소리, 나라, 또는 가다의 공간으로 입장한 관객들은 까마귀를 따라 (춤추면서)이동하며 4명의 영혼들의 삶을 스치듯 경험한다. 결국 이 공연은 4번을 봐야 전부 봤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천장이 뚫려 있어 다른 공간의 소리가 넘어오고, 가림막을 반쯤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인접한 공간을 볼 수 있어서 내 눈 앞에서 직접 노래하는 건 한 명의 영혼 뿐이더라도 다른 영혼들의 삶의 궤적을 유추할 수 있다. 작곡가 지미 세르는 뮤지컬 작업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노래 대부분 두 명 이상의 인물이 동시에 같은 가사를 노래하면서 조금씩 변주하는 형태로 부르고 있어 매우 독특했다(그리고 그는 리프라이즈의 신이다).
제 이름 두 글자를 겨우 기억해냈던 영혼들은 돌고 도는 관객들과 함께 인생의 파편들을 기억해 낸다. 관객들은 처음 입장한 그룹과 함께 까마귀의 인도 하에 놀이터의 회전무대(뺑뺑이라고 부르던 그거)를 돌듯이 인물들의 삶을 한 조각씩 맛보는데, 춤추며 뛰다 보니 흡사 GX를 방불케 하는 열광적인 뺑뺑이를 돌았다. 한참을 돌다가 숨을 좀 돌리면 네 명의 영혼들이 각자 어떻게 죽었는지 노래한다. 오직 까마귀들만이 자유자재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억의 환기를 도와준다(사실 기나긴 장르명 중에 송쓰루는 사실이 아니다. 아니면, 배우들이 겹쳐 말하던 그건 대사가 아니라 노래였을까?).
공연이 약속한 대로, 네 명의 영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치르는 합동 장례는 휴머니즘, 코미디, 블록버스터를 다 보여준다. 저마다 전혀 다른 스펙터클한 생을 살아온 영혼들의 삶이 교차하고, 벽이 열리면서 합동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합동 장례식의 조문객은? 관객인 우리들이다. 저마다 원하는 게 확실한 영혼들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포옹하면서 최선의 조문을 한다.
장례식은 결국 산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닐까?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도 원하는 죽음 하나 얻지 못했던 성석과 소리, 나라, 가다의 원을 풀어줬지만, 결국 그들을 조문하던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한 바탕 뛰면서 열심히 조문하고 나니, 묘하게 후련해진 감각이 남았다. 남들과 다르다고 차별 받은 이, 노력을 인정 받지 못한 이, 불우한 환경 속에 내쳐진 이들 모두, 다 함께 춤추고 포옹하고 묵념하면서 한 발짝 나아갈 용기가 생겼기를. 장례식의 조문객으로 왔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 장례식의 영혼들이 되어 차차차원의 틈에 들어설 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