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샌드맨 후기: 어쨌거나 샌드맨은 한 번은 영상화되었을 테니까
※시즌1 스포일러
우선은 샌드맨 원작을 본 적이 없음을 밝힌다. <멋진 징조들>과 <신들의 전쟁>의 닐 게이먼의 히트작이자 그래픽 노블 최초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그웬돌린 크리스티의 루시퍼를 보기 위해서 봤다.
EMO언더라인을 그린 강력한 꿈의 신의 파괴의 여정...을 기다리던 나는 시작부터 아마추어 마술사에게 잡힌 주인공에게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 그렇게 강한 놈이 아닌가 보지...?
<샌드맨>의 시즌 1은 2페이즈로 이루어져 있는데, 1~5화는 자유를 되찾은 주인공 모르페우스가 꿈을 다루는 데 필요한 도구(루비, 헬멧, 모래)를 되찾는 과정, 6~10화는 꿈 소용돌이(vortex)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한 꿈과 현실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1~5화]
영원의 일족, 꿈의 왕, 이야기의 왕자, 오네이로맨서 모르페우스는(놀리고 있는 게 맞다) 아들을 살리고 싶어하는 웬 부자한테 잡혀서 1화 내내... 잡혀 있다. 나올 수 있는데 봐준 것도 아닌 듯 하다... 그냥 꼼짝 없이 잡혀 있었다. 그 동안 늙은 부자는 모르페우스의 도구를 사용해서 세를 불리고 별로 사랑 받지 못하던 그의 아들도 자라서 애인도 사귀고... 그가 늙어서 휠체어 신세가 될 때까지 100년 간을 모르페우스는 잡혀 있었다. 멋있게 탈출해서 멋있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긴 하는데 그 후로 모르페우스가 무슨 가오를 잡든 '님 그래봤자 인간한테 100년 간 잡혀 있었잖아요...' 생각밖에 안 든다.
1~5화의 메인 빌런은 존 디(John Dee)라는 백인 인셀남이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4~5화를 보는 동안 시각효과를 믿고 작가진이 스크립트를 등한시 했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인셀남의 어머니 에델 크립스는 모르페우스를 가둔 로드릭(그 아마추어 부자영감)의 정부로 들어가 존을 임신했지만, 아이를 지우라는 말에 샌드맨의 도구를 훔쳐 나와서 예술품 브로커가 되어 도구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산다. 존은 루비에 사로잡혀 에델에게서 루비를 훔쳐가고, 루비의 부작용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에델은 존이 로드릭의 아이임과 자신이 훔친 도구가 샌드맨의 것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고, 존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어머니를 향한 증오로 거짓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닿ㅎ..ㅎ.ㅎ... 엄마한테 버려져서 살인 저지르는 아들들 얘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원작 <샌드맨>의 출간 시기를 감안한다 치자. 하지만 <샌드맨>은 어차피 한 번은 영상화될 콘텐츠였고 지금이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아니, 사실은 좀 늦었다.
루비를 손에 넣은 존 디가 날뛰는 4~5화는 끔찍했다. <제시카 존스>에서 악명 떨치던 킬그레이브가 기껏 하는 일이라는 게 중국집 가서 아마트리치아나 시켜 먹는다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킬그레이브는 관객들에게 못난 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고안된 장치 같았다면 존 디의 경우는 존 디의 이상에 경외와 끔찍함 같은 것을 느끼라고 구성해 놓은 것 같아서 더 괴로웠다... 싱글 4명, 커플 2명이 들어와서 결국 커플 3쌍이 탄생하는 괴이한 전개(농담이 아니다)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루시퍼가 아직 안 나왔으므로!!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하는 아니 이런 제가 <샌드맨>을 보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나요? 싶은 존의 솔직담백한 메시지를 보고 있는데 또 잔인하기는 엄청 잔인해서 뜨악했다. 아무튼 모르페우스는 존 디를 물리치고 다시금 꿈세계의 왕이 된다. '꿈'으로 싸워야 하는 걸 보여줘야 하니 사실 액션 신에선 망토가 멋있게 펄럭거리거나 모래가 멋있게 사락거리는 게 다다. 검은 망토가 펄럭거리는 걸 멋지게 구현해놓은 시각효과를 보고 정신줄을 좀 놓은 게 분명하다.
[6~10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좀 더 재미있었다. 왕위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다시 찾아왔고, 동시에 모르페우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인 악몽 코린트인을 찾아나선다.
1~5화에서 충신들 말도 처 안듣고 독선적인 데다 제멋대로인 모르페우스(작가가 자아의탁하는 캐릭터라는 게 보여서 더 차게 식었음... 닐 게이먼 젊었을 때 닮아서 더 그렇다..)를 6~10화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보듬어서 그를 좀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를 이끌어주고 소셜라이징하게 해주는 형제가 있는 반면 그를 적대시하는 형제들도 있다. 이건 시즌2를 기대하시라. 당연하겠지.
1화에서 모르페우스로부터 도망친 코린트인이 2페이즈에서 좀 더 활약하게 된다. 모르페우스가 100년 간 갇혀 있는 동안 역사적인 연쇄살인마가 되어 다른 연쇄살인마 꿈나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코린트인은, 로즈를 구슬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고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코린트인은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며 피해자의 눈을 뽑아가는 쾌락살인마인데, 이 드라마를 그나마 볼 만하게 해주는 건 그가 남자만 죽이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배신 당해서 복수를 꿈꾸는 인셀남에 이어 여자 죽이는 잘생긴 연쇄살인마가 나왔다면 드라마 <샌드맨>은 2022년엔 진짜 지옥으로 가야 한다.
잠깐 루시퍼 얘기를 안하고 갈 수가 없다. 포스터 보고 상상했던 비주얼이랑 약간 다른 루시퍼는 차치하고, 루시퍼와 모르페우스의 꼬리물기 게임을 보면서 아... 이게 영상화의 단점이구나 생각을 했다. 이제 CG로 뱀을 잡아먹는 기사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건 대단하지만, 상상 속에서 상대를 개념적으로 이긴다는, 설정만 보면 정말 멋진 게임인데 이걸 현실적인 영상으로 보니까 너무 웃겼다... 우주로 날아가서 나는 반물질이다 할 때부터는 거의 울었다. <샌드맨> 같은 스케일을 영상화할 수 있는 시점에 드라마가 나온 거겠지만, 범람하는 대자본 드라마들 중에 <샌드맨>의 영상미가 개중 뛰어난가 라고 물으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넷플릭스 드라마들이다 그렇듯이 <샌드맨> 또한 시즌2를 기대하세요!를 장대하게 외치며 끝난다. 너무나 진지하게 dream과 hope를 동치시켜 말하는 모르페우스를 보기에는 내가 너무... 닳고 닳았나 보다... 원작을 보지 않아 열광할 요소가 없었던 나는 그렇군... 흠.. 그렇군요... 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데 왜 이렇게까지 잔인한 지도! 원작 팬덤이 모두 성인들일 테니 그걸 반영한 걸까? 워낙에 유명한 타이틀이고 원작자 닐 게이먼이 깊숙이 관여한 넷플릭스 화제작이니, 원작을 보지 않아도 열광할 수 있을 만한 드라마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만큼은 아니었다. 원작을 안 본 나도 알고 있던 백인 고스걸 이미지의 '죽음'을 흑인으로 바꾸고, 조연들은 헤테로 커플보다 동성 커플이 더 많이 나오는 등 21세기 눈치를 좀 보긴 봤는데, 가장 큰 셀링 포인트인 모르페우스와 코린트인은 여전히 백인남성인 걸 보니 갈 길이 멀구나 싶다. 원작팬이 많은 인기 타이틀의 영상화/리메이크일수록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