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 Live 폴리스(Follies) 후기: 오, 내일! 내일이 온다니!
뮤지컬 폴리스(Follies)
- 공연기간: 2021년 10월 2일, 10월 6일, 10월 7일
- 공연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원작: 제임스 골드먼 (James Goldman)
- 작사, 작곡: 스티븐 손드하임 (Stephen Sondheim)
- 연출: 도미닉 쿡 (Dominic Cooke)
- 주연: 이멜다 스탠턴 (Imelda Staunton / 샐리 듀란트 역), 재니 디 (Janie Dee / 필리스 로저스 역), 필립 쾌스트 (Philip Quast / 벤자민 스톤 역), 피터 포브스 (Peter Forbes / 버디 플러머 역) 외
- 제작: 영국 국립극장
1971년 뉴욕, 철거를 앞둔 와이스먼 극장에서 ‘폴리스 걸’들이 30년 만에 모이는 파티가 열린다. 한때 화려했던 이 극장에서 공연했던 배우들은 중년을 넘긴 나이가 되어 옛날을 회상하며 무대를 펼친다. 폴리스 걸이자 친한 친구였던 샐리와 필리스,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인 버디와 벤 네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과거의 엇갈린 사랑에 대한 후회와 미련의 감정을 회상한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며 갈등으로 치닫는데... (국립극장 홈페이지 발췌)
'지그펠트 폴리스(Ziegfeld Follies)'는 플로렌즈 지그펠트 주니어가 파리의 뮤직홀 Folies Bergère에서 공연되던 레뷰를 모방하여 1907년 ~ 1931년 동안 뉴욕 브로드웨이에 올린 전설적인 레뷰 시리즈이다.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 코러스(지그펠트 걸 - Ziegfeld Girls)로 특히 유명하다. 플로렌즈 지그펠트 주니어가 특정 신체 사이즈까지 요구하며 엄선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야한 옷을 입고 춤추는 '지그펠트 폴리스'는 (당연히)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당시 스타덤을 꿈꾸던 젊은 여성들에게도 지그펠트 걸은 최고의 영예였다.
세계대전도 살아남은 '지그펠트 폴리스'였지만 결국 대공황으로 문을 닫고,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은 은퇴한 지그펠트 걸들이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서 착안한 것이 '폴리스(Follies)'이다.
폴리(folly)는 광기나 어리석음을 일컫는다. 와이즈먼의 '폴리스'가 공연되던(당연히 지그펠트가 원안이다) 뮤직 홀을 허물고 사무빌딩을 세우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와이즈먼 걸'들이 모여 일종의 동창회를 연다. 개중에는 와이즈먼 걸을 발판 삼아 배우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와이즈먼 걸이었다는 것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이자 유일의 자랑거리로 남은 사람도 있다. '폴리스'는 같은 시기에 공연을 하며 절친 사이였던 샐리와 필리스, 매일 밤 극장 출입구에서 둘을 기다리던, 현재는 둘의 남편인 벤자민과 버디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전개된다. 과거에 후회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30년 전의 후회에 여전히 붙들린 사람이라면? 사랑, 돈, 또는 명예욕에 차서 그것이 전부인 줄만 알고 청춘을 바쳤던 뮤직 홀에서 재회한 이들의 어리석음이 모두 모여(follies) 광기로 폭발한다.
오래된 극장은 항상 모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극장이란 공간이 특히 더 그렇다. 한껏 차려 입은 관객들이 샴페인을 즐기며 즐겁게 관람하지만 어두운 백스테이지에는 가진 건 열정밖에 없는 청년들이 기를 쓰는 곳. 어두운 소대에서 밝게 빛나는 무대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하며 꿈에 젖는 곳. 커튼이 닫힘과 동시에 매일 밤 환상은 죽고 힘든 현실로 돌아가는 곳. '스타 탄생'부터 '브로드웨이 42번가'까지, 극장가와 쇼비즈니스 그 자체를 다룬 쇼들이 얼마나 많았나(그리고 관객들은 극장까지 가서 극장에 대해 노래하는 쇼를 본다). 1930년생인 스티븐 손드하임은 '폴리스'에 자신이 사랑하는 극장과 공연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았다. '폴리스'의 넘버는 20년대에 유행했던 스타일에서 따온 게 많고, 샐리와 필리스, 벤자민과 버디의 어리석음을 노래하는 마지막 4곡의 넘버는 당시 레뷰의 전형적인 넘버 - 코믹 넘버, 쇼 넘버, 토치 송(보통 사랑의 감정이나 후회를 노래하는 솔로) 등 - 스타일을 취한다.
군상극의 대가답게 '폴리스'는 별다른 플롯이 없는데도 말로 내뱉으면 그저 구질구질할 뿐인 불륜이며 중년의 회한, 이런 것들을 공감 가게 잘 짜 놓았다. 메인 플롯인 샐리와 필리스, 벤자민과 버디 외에 일회성으로 등장하는 조연들의 넘버도, 와이즈먼 걸 이후 그들 인생의 이모저모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인물들이 무대에 나올 때마다 젊고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이 폐허가 된 뮤직 홀에 그림자처럼 함께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유령들이 과거의 영광 속을 아직 헤매고 있는 것이다(극장은 귀신이 많이 나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뮤직 홀은 사라지고 새 시대에 맞춰 사무빌딩이 들어서듯, 과거의 후회와 집착을 극복했든 극복하지 못했든 주인공들에게는 내일이 오고 또 내일을 살아내야 한다.
'폴리스'를 보면서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브로드웨이를 달구었던 '폴리스'는 사라졌고 이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했지만, 극장은 죽지 않았고 로저스&해머스타인을 필두로 40~5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황금기가 찾아온다('오클라호마', '남태평양', '애니 겟 유어 건', '마이 페어 레이디' 등 우리가 아는 '뮤지컬'의 시대다). 클래식 뮤지컬의 전성기를 거쳐 결국 현대 뮤지컬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까지 나오게 되지 않았는가. 시놉시스를 읽고 예상했던 것보다 인물들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져서 그런 듯 하다. 손드하임 또한 '지그펠트 폴리스'의 음악을 듣고 자랐을 것이다. 극장의 출연자 출입구에서 배우들을 하염 없이 기다리거나 뒷문을 통해 숨어 들어간, 어린 시절의 자신을 구성한 소중한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눈물 나게 아름다워도 유령일 뿐이다.
보통 조연 역할로만 등장하는 중년의 배우들을 잔뜩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은 작품이었다. 다들 어디에 숨어 계셨나요, 생각할 정도로 노래와 춤과 연기를 정말 잘 한다. '집시'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로 NT Live에도 이미 여러 번 출연한 이멜다 스탠턴은 아직도 소녀 시절의 사랑에 붙들린 샐리 듀란트를 완벽하게 연기한다. 영국에서 연극과 뮤지컬에 꾸준히 출연해 온 재니 디는 시종일관 꼿꼿한 유명인의 아내 모습을 유지하다 러브랜드에서 신들린 춤과 노래를 보여준다('Could I leave you? Yes! Will I leave you? Guess!'를 외치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벤자민 스톤과 버디 플러머 역의 필립 쾌스트와 피터 포브스도 아저씨들 징그럽게 왜 이래요! 싶은 마음만 드는 캐릭터를 눈물 나는 연기력으로 소화해 낸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한데 모두 톤다운된 조명을 받는 과거의 환상일 뿐이고, '러브랜드'라는 반어법적 이름으로 샐리와 필리스, 버디와 벤자민의 내면을 노래하는 장면은 그를 조롱하듯 작정하고 레뷰 스타일을 차용해서 악독하기까지 했다. 중년의 위기를 다룬 작품이긴 하지만 일이든 어딘가에든 열정을 바쳤었고 현재 모종의 회의나 후회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듯 하다.
*써 놓고 보니 나도 너무 과몰입했다. 어릴 때 공연 보던 기억은 나한테도 너무 소중한 기억이다.
*본격 비혼장려 뮤지컬이자 손드하임의 다른 작품 '컴퍼니'를 생각해보면 정말 결혼제도를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싶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믿는데 결혼 불신이 엄청난 것 같다. 근데 검색해보니 2017년에 48살 연하 동성 연인이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있다고 한다 아니 할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