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드북(Red Book) 후기: 난 빡칠 땐 레드북 생각을 해
뮤지컬 레드북 (Red Book)
- 공연기간: 2021년 6월 4일 ~ 2021년 8월 22일
- 공연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 주연: 차지연, 아이비, 김세정 (안나) / 송원근, 서경수, 인성 (브라운) / 홍우진, 정상윤, 조풍래 (로렐라이) / 방진의, 김국희 (도로시 & 바이올렛)
- 예술감독: 송은도 / 프로듀서: 임병우, 한경숙 / 제작총괄: 방산 / 제작피디: 김희래 / 작: 한정석 / 음악: 이선영 / 연출: 박소영 / 편곡, 음악감독: 양주인 / 움직임: 홍유선 / 무대디자인: 이은경 / 조명디자인: 정구홍 / 음향디자인: 한문규 / 영상디자인: 이수경 / 의상디자인: 도연 / 소품디자인: 노주연 / 분장디자인: 장혜진
- 주최: (주)아떼오드
- 제작: 플레이더상상(주)
남편감을 찾아 결혼하는 대신 일자리를 찾는 안나는 마을 모두가 인정하는 괴짜다. 그런 안나가 예전에 하녀로 일했던 바이올렛이 안나에게 유산을 남기고, 바이올렛의 유언집행인이자 손자인 브라운이 안나를 찾아오는데… 유능한 변호사지만 문법과 타자에 소질이 없던 브라운은 안나를 타이피스트로 고용하게 되고, 거듭된 실패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기죽어 있던 안나는 여성들이 모여 글을 쓰는 ‘로렐라이의 언덕’이라는 모임을 알게 된다. 안나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장점이 있다’는 브라운의 격려에 힘 입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야한 상상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너무 많이 봐서 우리집 뒷동네 같은 근대 런던의 골목길이 펼쳐지고, 탑햇을 쓴 신사들과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는 <레드북>은 시작부터 정겨운 향취를 풍긴다. 디즈니 뮤지컬스러운 경쾌한 멜로디와 안무에 어딘가 딱딱해 보이는 안나가 등장하면 쉽게 짐작하게 된다. 시대극 배경으로 걸캔두애니띵 외치는 뮤지컬이구만.
<레드북>은 넘버가 좋고 가사가 서정적이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무대와 연출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레드북>은 근본적으로 극본과 연출과 작곡이, 나아가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와 싸우고 있다. 여성자립을 외치는 수많은 여성서사 뮤지컬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당연하게도 이성 파트너다. 이 정도 규모 뮤지컬에는 어련히 러브 듀엣이 필요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전개도 장르적 특성으로 이해하고 흐린 눈을 하고 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서사 작품에만 완벽을 요구하고 한 톨의 결점마저 수용하지 않는다는 비판 또한 인정한다. 아무래도 기대가 더 크니 실망을 더 디테일하게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이 후기는(제목에서 보이듯이) 불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한 번, 여성서사 뮤지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성 파트너의 존재와, 그와 사랑에 빠져야만 하는 스토리이다. 여자의 가장 큰 덕목이자 임무는 남편감을 찾는 것이고 남편에게 아내가 종속되어 있던 시대, 스스로 돈을 벌고 싶어하고 남편 찾는 데도 시큰둥한 안나는 존재 차제만으로 파격이다. 하지만 그런 안나를 타이피스트로 고용하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브라운의 등장으로, 안나는 당연하게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안나의 가장 큰 특장점은 남자 없이 잘 사는 독립성이었다. 그렇다면 안나의 입을 통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신사들은 탑햇을 쓰고 숙녀들은 드레스를 입던 시기의 런던, 안나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여자의 의무는 남편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이미 (표면적으로나마)당연히 아니라고 합의된 사항들을 ‘옛날 배경’이라는 좋은 구실로 큰 소리 쳐 봤자, 안나의 외침은 공허하게 들린다. 예를 들어 ‘책은 여자만 읽는데 출판사와 평론가들은 아직도 남자 독자 기분만 맞추려 한다’느니 ‘심사위원에 남자만 있어서 여성작가들이 수상에서 밀려난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대사로 넣기에 망설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건 아직 모두가 동의한 이슈가 아니고 현재의 이익 당사자들이 얽혀있는 이슈이기 때문에.
여자도 야한 생각하고 야한 글 쓰고 자기 주장 할 수 있다. BL이 양지로 나올 정도로 시장이 커지고 콘텐츠 플랫폼 포스타입의 대부분이 여성작가인 판에 <레드북>은 무슨 의의를 가지는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차별을 타파하는 여자주인공을 보면 그 잠깐은 쾌감일 수 있다. <난설>, <마리 퀴리> 등 당대의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았던 허구 또는 실존한 여성을 다룬 작품들이 여럿 나왔지만,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 ‘여자의 유일한 행복은 결혼이 아니다’라는 지금 와서 당연한 이야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논의를 했으면 한다.
나이가 차도록 결혼하지 않아서 안나는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브라운의 등장으로 안나 또한 당대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어가 버린다. 돈도 잘 버는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작중 안나가 주장하던 바를 생각해 보면 안나는 그 돈으로 혼자 사는 게 마땅하지 않았을까? 돈 많고 (당대 남자답지 않게)사려 깊은 동정남 브라운 때문에 안나의 이야기 또한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되어 버린다. 문제 해결도 결국 브라운이 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를 가장 갸우뚱하게 만든 것은 로렐라이의 언덕이다(말이 갸우뚱이지 개빡쳤다). ‘로렐라이의 언덕’은 글을 쓰는 게 허용되지 않았던 당대 분위기에 맞서 여성들이 모여 글을 쓰는 모임인데, 수장인 로렐라이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남자다. 여성들만의 공간을 꿈 꿨지만 억울하게 죽은 무희 로렐라이의 유지를 이어 받아 로렐라이로 살아간다는 남자(누구 맘대로??)라는 설정인데, 그래서 그런지 드레스를 입고 숨어든(여기에 ‘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브라운을 보고 자기 후배라면서 모임에 받아준다. 여성들만의 공간이 뭔지 단단히 곡해한 게 틀림 없다. 그러니까 드레스 입고 여자들만 있는 로렐라이의 언덕을 꾸릴 생각을 했겠지. 영화 <히든 피겨스>와 <그린 북>에서도 지적 받았던 흑인들 인종차별을 도와주는 ‘선한 백인’, 또는 레즈비언이나 여성 주연물에 꼭 감초처럼 등장해서 중요한 순간에 조언을 주는 ‘게이 친구’를 그대로 답습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레드북>은 여자한테 마이크가 돌아가는 여성주인공 뮤지컬인데도 주조연 3명 중 2명이 남자인 웃기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더욱 지적하고 싶은 것은 딕 존슨이라는 캐릭터다(성추행 가해자 이름이 고추고추인 게 웃겨? 하나도 안 웃겨). 유명평론가 딕 존슨은 평론을 써주겠다고 안나를 꾀어내어 작가로서의 성장을 위해 자신과 성관계를 맺자고 한다. 극중 안나는 말 그대로 시집도 못 갈 정도로 야한 글을 썼다는 설정이지만 그건 ‘그 행위’니 ‘여자의 몸 - 머리얼굴어깨무릎발’이니 하며 순화되어 표현되고, 인기를 끈 소설도 아픈 소년을 위해 소녀가 병문안을 간다는, 듣기에는 손만 잡을 것 같은 힐링물 소재다. 극중에서 ‘섹스’라는 정확한 단어는 딕 존슨의 입에서 나오며, 하하호호 원하는 것을 노래하면 이루어지는 뮤지컬~~ 이라며 작품 내내 장르 문법에 충실하게 얼렁뚱땅 넘어가다가 딕 존슨의 추행 장면만 리얼리즘이 돋보인다(평론은 작가의 육체와 평론가의 영혼의 섹스라고????). 위계에 의한 성추행 좀 해보셨나봐요 싶은. 더욱 유해한 것은 딕 존슨이 거시기 개그를 마구 치는 와중에도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웃긴 춤을 추면서 관객들에게 라이커블한 캐릭터로 나온다. 둘이 만나는 장면은 관객들이 웃음을 계속 터뜨리는 장면이고, 그 광경을 보면서 딕 존슨을 진심으로 경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딕 존슨은 하비 와인스타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짓을 안나한테 하면서 웃음까지 가져간다.
재판 장면에서 작품은 더더욱 모순으로 향해간다. 딕 존슨은 앙심을 품고, 레드북이 외설적인 내용으로 사회에 해를 끼쳤다며 안나를 기소한다. 무죄를 받기 위해 집필 당시 정신이상 상태였다는 진술을 거부한 안나를 위해 브라운은 레드북이 ‘정말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려고 레드북 독자들의 후기를 가지고 온다. 후기는 이런 식이다: ‘레드북을 읽고 성격 괴팍하고 맘에 안 드는 구혼자의 장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레드북을 읽고 지금은 데면데면한 남편과의 첫만남이 떠올라 불타올랐다’. 결국 레드북은 기존 사회제도(이성 간 부부)를 전복시키는 게 아니라 공고히 하는 매개체였다. 결혼제도에 편입된 이상 아내는 남편이 외도를 해도 이혼할 수 없고 남편의 부속품 취급되는 데 분노했던 안나라면 이러한 후기에 이상함을 느꼈어야 맞다. 하지만 뮤지컬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지요~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하는 식으로 넘어간다.
대망의 마지막, 로렐라이의 언덕은 제2의 안나가 되고 싶어하는 여남 작가 지망생들로 들끓고 로렐라이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제2의 안나가 되지 말고 제1의 당신이 되어라’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실상 남자들은 로렐라이의 언덕만 빼고 어디서라도 글을 쓸 수 있다. 사회가 여성의 글쓰기를 금지해서 여성들이 안전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게 로렐라이의 언덕이었는데, 로렐라이는 탄생 의도와 배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여 버린다. 이것도 아마 로렐라이가 남자라서 그럴 것이다(농담 아님).
이 모든 게 뮤지컬 장르와 그 장르가 지닌 선입견의 한계(막이 걷히자마자 보이는 런던 건물 풍경과 올드한 브로드웨이식 안무를 보면 분명 느껴지는 선입견이 있다)인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극작가의 문제일까? <레드북>은 마치… 페미니즘을 표방하지만 속은 이퀄리즘을 주장하는 뮤지컬 같았다. <레드북>이 페미니즘 뮤지컬을 표방했었는지는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넘버로 시작하는데 실상 어떻게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결국 안나는 브라운과 이어져야 하고 여자는 배척 받아도 남자를 배척해서는 안 되며 차별을 한 것은 남자지만 여남 모두 행복한 뮤지컬이 되었다. 메인 주제가 억압 받던 여성이라서 이렇게까지 화딱지가 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