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후기: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불완전해졌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Maybe Happy Ending)
◇ 공연기간: 2021년 6월 22일 ~ 2021년 9월 5일
◇ 공연장: 예스24 스테이지 1관
◇ 출연진: 신성민 / 임준혁 / 정욱진 (올리버 역), 홍지희 / 해나 / 한채아 (클레어 역), 성종완 / 이선근 (제임스 역)
◇ 창작진: 박천휴 (작/작사), 윌 애런슨 (작/작곡/편곡), 김동연 (연출), 주소연 (음악감독), 송희진 (안무), 박지혜 (협력연출), 조수현 (무대/영상 디자인), 마선영 (조명 디자인), 권지휘 (음향 디자인), 도연 (의상 디자인), 정이든 (소품 디자인), 장혜진 (분장 디자인)
◇ 제작: CJ E&M
◇ 작품개발: 우란문화재단
※스포일러 없음!
'바이센테니얼 맨(1999)', 'A.I.(2001)', '월-E(2008)'까지, 구형 로봇들의 애달픔과 사랑을 그린 영화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한 때 최신 기술을 상징하던 로봇들이 앞서 나가는 시대의 속도에 뒤떨어져서도 설계 당시 본연의 목표를 우직하게 지켜 나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 아프고, 괜히 이런 류의 소재들이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게 아닐 것이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는 구형이 된 로봇 둘의 사랑을 그린다. 21세기 후반, 이제는 부품조차 더 생산되지 않는 헬퍼봇 시리즈의 5번째 모델 올리버와 6번째 모델 클레어가 그 주인공이다.
헬퍼봇5 올리버는 자신의 작은 방 한 칸에서 마냥 행복하다. 날씨는 좋고, 매달 새로운 재즈 잡지가 배달되어 오며, 아끼는 식물은 잘 자라주고 있는 데다, 빈 병을 팔아 모은 돈으로 언젠가 옛 주인 제임스를 찾으러 제주도(그렇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배경은 사이버펑크 서울이다)로 떠날 것이다.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헬퍼봇5 부품이 늘고 있지만, 헬퍼봇5는 역대 헬퍼봇 시리즈 중 가장 내구성이 좋고 웬만한 건 올리버가 수리할 수 있다. 올리버는 잘 해 왔고 잘 해낼 것이다.
헬퍼봇6 클레어는 미련도 아쉬울 것도 없다. 갈 곳 없는 구형 로봇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자신을 도와 줄 친구들도 있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 언젠가 기계 몸이 수명을 다 해 고철로 돌아간다 해도, 클레어는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매 순간 클레어답게 살다 죽을 것이다. 클레어는 지금껏 잘 해 왔고 잘 해 왔고 잘 해낼 것이다.
클레어가 충전기가 고장 나 도움을 청하러 오면서부터, 클레어와 올리버의 자족적 세계는 깨어진다.
아파트 층 전체에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라곤 자신들 둘 뿐에, 부품 생산이 중단되어 언젠가 작동을 멈추기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비슷한 한 쌍. 서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여행에 동행하면서 클레어와 올리버는 자연스레 사랑에 빠진다. 사랑! 사랑이 클레어와 올리버를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클레어와 올리버에게 행복이란 현재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는데,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어버렸다. 만나기 전의 둘은 각자 완벽했었고, 주어진 시간은 곧 멈춘다. 그런데도 둘이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작은 스노우볼 안의, 태엽을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작은 기계인형들을 보는 느낌이다. 데크를 일부 위로 띄우고 밴드를 세트 위에 위치시킨, 어찌 보면 오르골 같이 생긴 무대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되는, 그래서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은 세계는 완벽하다. 오랜만에 현실을 잊고 오롯이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배경은 21세기 후반의 서울이지만 21세기는 커녕 20세기에 멈춰버린 듯한 재즈음악과 축음기는 작품을 보는 관객들보다 구식이 되어버린 로봇들과 잘 어울린다. 자율적인 사랑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로봇들은 첫사랑을 경험하는 인간과, 그리고 구형이 된 로봇들은 죽음을 앞둔 인간과 많이 비슷하다. 사랑에 빠질 때의 설렘, 스치듯 지나가는 행복한 순간들, 그리고 상실.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